좀 더 성장해서는 담뱃갑만한 크기에 한쪽에서 보면 정숙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또 다른 쪽에서 보면 알몸이 다 드러나는 그런 카드가 바로 그런 것이다.
올해 초 배준성 작가의 전시를 본 이래 서울 중구 회현동 금산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해외에서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의 이번 전시에 신작 ‘움직이는 정물’ (Moving Still-Life) 10여 점을 선보였다.
사진 같기도 한 작품들은 입체적이다. 관람객이 움직이면 동시에 움직이는 그림은 동시에 움직이지 않는 그림이기도 하다.
레이어 층으로 된 이중 평면작업과 사람이 눈이 가로방향으로 약 65㎜ 떨어져서 존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양안시차에 기인한 렌티큘러 원리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보는 각도에 따라 아주 판이하게 달리 보이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
의술을 공부하는 한 청년의 진지한 모습이 언뜻 비치더니 어느새 자국민에게 독가스를 뿜어 대는 시리아 알 아사드 대통령 얼굴로 변해버린다. IOC 총회에서 도쿄올림픽 유치를 위해 모든 방사능 유출을 해결하겠다고 오른손을 치켜세우는 그 잘난 일본 수상의 얼굴도 보인다. 그것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원전 운영업체의 통제 불능 보도에 당황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눈을 휘둥글하게 만들었던 얄팍한 29만원이 1천670억원이란 뭉칫돈으로 요술처럼 변하는 순간이다. 가증스러운 전직 대통령의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훔쳐간 돈을 가지고 버젓이 자선파티의 주빈처럼 행세한다. 가히 렌티큘러 원리의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국민은 없는 살림에 등골이 휘어가며 세금을 내지만 정작 위정자라는 사람들은 자신의 돈인 양 흥청망청 써버린다. 심지어 일부는 자기 호주머니에 쑤셔 넣기까지 한 것이다.
특히, 시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나선 사람 중에도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두 얼굴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다. 표를 얻기 위해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던 사람들이 당선 이후 줄곧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건방지고 오만한 태도로 돌변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어느새 달라졌다. 이들이 부지불식간에 ‘착한 사람’ ‘선한 사람’ ‘믿을 만한 사람’ 모드로 변한 것이다. 아마도 내년 6월로 다가온 지방 선거 때문일 것이다.
사물이 비록 스스로 좌우로 움직여 우리의 시야를 흩트려 놓아도 우리가 바른 시각을 지니고 있다면 문제없지 않을까? 그동안 지켜보았으니 내년에 흔들리지 말고 잘 찍으면 되는 것이다.
“자, 이쪽에서 한번 보세요. 저게 원래 모습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렌티큘러 기법은 눈으로 보는 사물에만 적용되는 게 아닌 듯하다. 우리 마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만약 같은 시간을 두고 “벌써 반이 지났어!” 라고 탄식 할 수 도 있고, “아직 반이나 남았어!” 라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일영 애플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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