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병자호란 발발 379주년이면서 정도(定道) 600주년이다. 1637년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다가 삼전도에 내려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번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의 항복의식을 행하고 삼전도에 투항비를 세웠다.
반만년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 굴복이었다. 광해군의 사대교린 외교를 무시한 인조의 사대외교가 빚어낸 비극이라고 폄하하고 있지만 사실은 식민사관에 기반을 둔 편견에 불과하다. 당시 중립외교든 친명이든 명-청 교체기 동아시아 정세를 파악하는 안목의 결핍과 이순신, 유성룡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데 있었다.
이에 비해 청군 장수 도르곤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함락시킨 장본인이고 범문정은 삼전도비를 주도했지만 우리는 그들을 주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식민사학의 여파로 외침을 강조하는 삼전도의 비극은 강조하면서 수지전투와 김화전투의 빛나는 승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수지전투란 수지 머흐내 고개 [험천현]의 패전과 형제봉과 수지일대에서 거둔 대승을 말한다. 충청군은 12월 27일 머흐내 고개에 진을 치고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려 했지만 양굴리가 이끄는 별동대가 험천서(西)의 높은 고지를 먼저 점령하고 쳐내려 왔다. 10여 차례 방어에 성공했으나 1월 2일 기력이 다해 최진립 등 지휘부 다수가 순절하고 대패했다.
역대 조정에서는 대대로 제사를 지내며 위무했다. 전라 의왕군의 선봉을 맡은 김준룡 장군은 1월 4일 수지에서 청군과 대치했다. 1월 5일 형재봉 진지에서 청군을 막아 내고 다음날에는 청군 장수 양굴리와 호군대장 몇을 조총으로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양굴리는 태종의 사위로서 충청군을 먼저 격파하고 이 전투에서 전사하자 청태조와 동일 묘역에 묻힌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만주 실록에도 나타난 대 사건이었다.
수적 열세에 비해 조선군의 승리는 3수군(포수, 사수, 살수)제 편성과 탁월 지휘력 때문이었다. 김화 전투 또한 패륵 야빈대를 사살하고 대승했다. 두 번째 승리였다. 두 전투 모두가 삼수군과 무신선비들이 지휘한 싸움이었다.
160년이 지난 후 영의정 채제공은 수원쪽 광교암 바윗돌에 전승석비를 각인하며 수지 전투의 승리를 기렸다. 하지만 일부에서 이 석비가 위작이라는 반론이 제기하고 기념물 지정 기각을 청원했지만 수원 박물관에 의해 부인되었다.
세워진 비석의 진위보다는 어떻게 소수병력으로 이런 전과를 올렸으며 그 뒤 우리는 어떤 조치와 교훈을 얻었는가? 전승 후 김 장군은 후일을 도모하자며 수원쪽으로 퇴각한 것을 패전으로 몰아 부치고 결국 귀양을 보냈다. 얼마 후 풀렸지만 정조 때 가서야 비로소 충양공으로 서훈된다. 전승 기억은 고사하고 전승 석비가 수원 경내에 있다는 이유로 하광교저류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든가 호항골[湖降谷]을 호황골[胡黃谷]로 적는 무관심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심곡서원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병자호란 때 불탔다는 기록이 발견되었으며 대찰 성불사도 이때 소실되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수지 검드레산과 방축골[方築리-토월리]은 김 장군이 방진을 쳤다는 지명에서 유래한다고 향토사학자들은 전한다. 이번 보름날에는 광교산 형제봉에서 378년 전 수지전투를 기억하는 기념식과 학술회의 및 순절 추념식을 갖는다고 한다. 명절을 맞아 호국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은 어떨지?
진용옥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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