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했던 ‘거리의 삶’ 접고… 춤추는 무대서 화려한 부활
집에만 있는 나를 향해 가족들은 무능력자라며 손가락질했다. 길거리로 숨었다. 그렇게 3년 거리에서 먹고 잤다. 그러다 빅이슈(BIG ISSUE) 판매원이 됐다. 그리고 발레를 배우게 됐다.
차가운 바닥에서 자고 싸늘한 시선에 고개 숙였던 내 몸은, 딱딱했다. 춤은 어려웠다. 숨으려고만 했던 나는 춤을 추면서 비로소 허리를 곧게 세웠다. 난생 처음 의지가 되는 사람도 생겼다. 예쁜 발레리나님들이다. 함께 호흡하고 한 무대에 선 것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산다는 것이 좋아졌다. 나는 이제 꿈을 꾼다.
어엿한 직장인으로 가족을 이루는 기적같은 소원을 매일 빌어본다. 생각을 바꾸면 희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일이 언젠가는 찾아온다는 것을….”(서울발레시어터 <호두까기 인형>에 발레리노로 무대에 올랐던 노숙인 오현석(46)씨의 인터뷰 중)
우리나라 노숙인은 얼마나 될까. 정확히 집계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노숙인수가 각종 지원책과 프로그램에도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1998년 5명에서 2009년 357명으로 급증한 노숙인 사망자수(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우리나라 노숙인 사망실태’)가 방증한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무연고 사망자 등 포함되지 못한 노숙인 사망자를 1천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노숙자가 재활에 성공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역시 명확한 통계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길거리로 숨은 사람들이 다시 사회로 재진입해 희망을 얻는 사례는 존재한다.
분명 있었다. 지난해 12월 과천시민회관 서울발레시어터 연습실에서 그 주인공들을 만났다. 수 년 동안 노숙인 생활을 하다가 빅이슈 판매원으로 활동, 자활 프로그램으로 서울발레시어터의 발레 수업을 받고 있는 최성도(38), 구본춘(40), 오현석(46), 최청복(48) 등이다.
이들은 뜨겁고 거친 숨소리를 내며 서울발레시어터 예술감독이자 안무가인 제임스 전의 지시를 따라 스트레칭과 발레 기본 동작을 따라하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숨을 길게 내쉬고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양쪽으로 몸을 뒤트는 간단한 동작에도 진지했다. 마치 ‘손길 그 끝까지 완벽하게 따라하고야 말겠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대형 거울 벽면에 등을 대고 기마자세로 선 후 눈을 감고 명상하는 짧은 시간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몸에 집중하라”는 제임스 전 서울발레시어터 예술감독의 목소리에 수강생들이 앞을 응시하거나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3분이 지났을까. 올라가는 손, 뒤틀리는 허리, 거칠어지는 호흡 등 의지와 달리 몸을 가다듬기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참으세요”라는 말에 제멋대로 움직이던 것들이 다시 평정을 되찾는다. 연습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순간인 듯하다. 이들은 얼마나 긴 시간, 이 같은 훈련을 반복한 것일까.
“어린 시절 미국 뉴욕에 이민가서 노숙인을 접한 경험이 많았어요. 자연스럽게 그들이 사회로 복귀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죠. 예술이 그들을 치유할 힘을 가졌다고 믿었어요. 마침 지난 2010년, 한 대기업이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재능기부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저는) 노숙인들에게 발레를 가르치기로 했죠. 그 시작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네요.”(제임스 전)
특히 제임스 전 감독과 그의 아내이자 발레리나였던 단장 최인희씨가 수준 높은 작품 발표 뿐만 아니라, 발레를 기반으로 한 다채로운 사회 환원 활동을 벌여 주목받고 있다. 이들 부부는 서울발레시어터를 운영하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아동이 함께 수업받는 발레 수업과 미혼모를 위한 교육 등 많은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11년부터는 자립의지가 있는 빅이슈 판매원을 모집해 주 1회 발레 교육을 벌였다. 예술(발레)과의 스킨십을 통해 노숙인들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해 자립의 의지를 돕는다는 취지였다.
이후 서울발레시어터는 노숙인에게서 영감을 얻어 창작한 발레 <솔로이스트>를 선보이고, 현대사회의 소통을 주제로 삼은 모던발레 <꼬뮤니께>에 노숙인 출신 무용수와 전문 무용수를 함께 출연시켰다.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공연계 연말 단골인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었다. 서울발레시어터는 1막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 장면에 노숙인 무용수를 등장시켰다.
“연습할 때, 각 노숙인 무용수에게 ‘여러분은 지금 변호사다!’라고 말하며 멋진 직업의 캐릭터를 부여하죠. 난생 처음 화려한 옷을 입고 예쁜 발레리나와 함께 멋있는 전문직으로 무대에 올라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받고 박수받는 그 순간,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어요.”(제임스 전)
제임스 전 감독의 예상은 맞았다. 변할 것 같지 않던 노숙인들은 스스로 삶의 변화를 주도했고,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몸이 너무 굳어 있는데다가 냄새도 나고 자기들끼리 싸우기도 해서 가까이 가기 싫은 적도 있어요. 그런데 자꾸 지내면서 변화가 보이더라고요.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어떤 분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고, 어그러지던 동작도 해내고…. 스트레칭 할 때 아프다고 소리쳤던 분들도 이제는 ‘시원하다’면서 잘 따라하세요.(웃음)”
2년째 해당 수업의 진행을 맡고 있는 김영신 보조강사는 자랑스럽게 노숙인 출신 발레 수강생들을 바라봤다. 그녀는 노숙인 교육생들의 이름은 물론 성격과 취향을 꿰뚫고 있는 ‘안방마님’이다. 이날도 다리를 다친 수원의 수강생을 비롯해 송년 발표회가 끝나 더 많은 교육생이 참가하지 못한 것에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 강사의 마음을 읽었는 지 오현석(46)씨는 “원래 10명 이상 오는데 오늘 많이 못와서 아깝다”면서 자신의 발레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다가 노숙인 무료 쉼터에서 우연히 홍보물을 통해 빅이슈 판매원 모집 사실을 알고 도전했다. 더 큰 도전은 빅이슈 판매원으로 근무하면서 발레를 배우게 된 것이다.
“사실 인터뷰나 사진찍기는 싫은데…”라면서 입을 뗀 그는 예상 밖 환한 미소로 “저처럼 생각을 바꾸면 자립할 수 있다고. 희망을 얻으라고 다른 노숙인한테 보여주고 말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처음에는 열심히 해도 몸이 안 따라줘서 힘들었는데 천천히 따라하게 되고 예쁜 발레리나님들과 함께 호흡하고 무대에 서면서 처음으로 보람이란 것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3년째 발레를 배우고 무대에도 2번 이상 오른 ‘선배’ 최청복(48)씨도 표현은 서툴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그는 “길거리에서 생활하면 직장이 없고 실업자 생활을 해야 하고 배고프고 오갈데 없고 다시 그런 노숙자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서 “몸의 균형이 바른 자세로 바뀌면서 사회에서 만난 동료들과도 좀 더 편안하게 어울리게 될 수 있어서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발레를 배우면서 자신을 알리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던 그는 무대 공포증까지 극복하고 또 다른 무대를 꿈꾸고 있다. 모두 함께….
류설아기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