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찾는 사람들] 장애인 전용 화실 ‘소울음’

장애 있지만 화폭 앞에서 장애는 없죠

Untitled-1.jpg
▲ 선천성 뇌병변 1급 장애인으로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눌 수 없는 전봉권 화가. 손바닥만한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순 간만큼은 그 누구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 사람마저 행복하게 만든다. 전형민기자
“여행이 쉽지 않은 우리(장애인)에겐 그림의 소재를 찾는 것도 힘들죠. 그래도 인터넷으로 꽃과 바다 사진을 찾고 상상해서 그림을 그려요. 

캔버스 속에서는 하늘을 날 수도, 힘차게 대지 위를 뛸 수 있거든요.” 하얀 캔버스에 아름다운 이미지를 색색의 물감으로 표현하며 장애의 한계를 극복하는 이들이 있다. 누워서, 입으로, 발가락으로 완성한 그림은 다른 이들의 상처를 위로한다.

 

이 아름다운 희망의 붓질이 2016년에도 영원하길 응원하며 찾아가 봤다. 장애인 전용 화실인 ‘소울음’(원장 최진섭)이 그곳이다. 

“천천히 둘러 보세요. 저기 앉은 화가가 제일 오래 작업했어요. 인터뷰하려면 500원 내야 해요.”

전동 휠체어에 누워 명함을 주고 받은 소울음 화실의 최진섭 원장은 유머러스한 농담을 곁들여 회원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깨달음’이라는 의미를 가진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전용 화실인 ‘소울음’은 최진섭 원장이 지난 1992년 중증장애인들을 위해 마련한 곳이다.

고등학생 시절 그 누구보다 활동적이었던 최 원장은 다이빙을 하다가 허리가 다치는 사고를 당해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노력했다고. 처음에는 어깨를 움직이고, 나중에는 연필을 잡고, 이제는 그림을 그린다. 

 

장애는 최 원장의 움직임을 붙잡았지만 특유의 리더십과 삶에 대한 역동적 자세까지 앗아가지는 못했다.

그는 많은 척수 장애인이 병원 밖에서 하루 종일 TV를 보거나 멍하니 누워 있는 모습에 가슴 아팠다. 먼저 그림을 그린 ‘선배’로서 함께 그림으로 자유로워지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그 마음에서 소울음 화실이 탄생했다. 

 

이후 화실에는 알음알음 찾아온 장애인과 비장애인 회원들이 어우러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첫 대화를 나눈 전봉권(51)씨는 20대에 최 원장을 소개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바닥만한 캔버스에 붓질을 하고 있는 전씨의 표정은 한없이 밝다. 하지만 그는 단어 한 마디 내뱉기조차 힘들 정도의 장애를 안고 있다. 선천성 뇌병변 1급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애인 재활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일주일에 3번씩 화실에 나와서 그림을 그린다. 

 

그를 2년째 돕고 있는 봉사자는 “차라리 모르면 편안할텐데 (전씨는)머리로는 다 아는데 몸이 안따라주니까 그게 더 가슴 아프다”면서 “그래도 하나의 작품을 거듭 그려서 완성하는 장면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 보인다”고 귀띔했다. 

 

Untitled-2.jpg
화실 ‘소울음’에는 신체적 한계를 딛고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장애인 화가들이 함께 한다. 사진은 전동 휠체어에 누워서 그림 그리는 최진섭 원장과 화실 전경, 구족화가 임경식씨의 작업 모습.
화실에는 전씨처럼 물감을 짜는 것부터 캔버스를 옮기는 것까지 일일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장애인 화가 예닐곱명이 앉아 작업중이었다. 각기 다른 자세로, 각기 다른 크기의 캔버스에, 각기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애인 화가들은 최 원장처럼 밝은 미소로 인사했고 심지어 유쾌해보였다. 

 

그 중 임경식(39) 구족화가는 유독 밝은 색감과 자유로운 표현이 눈에 띄는 작가였다. 그는 7~8년 전에 소울음 화실을 알게 된 후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일주일에 2회 이상 찾고 있다. 열 아홉 살에 겪은 교통사고로 2년 동안 병원에 누워있었던 그는, 어려서 겪은 사고인만큼 자신이 평생 이같은 장애인으로 살게 될 지는 몰랐다고 술회했다. 

 

“장애를 받아들이면서 나를 놓아버렸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전신마비가 뭘 할 수 있겠냐고요. 집에서만 있었죠. 서른 살 넘어 뭔가 하고 싶은데 입으로 도구를 이용해 하는 일이라곤 영화를 다운받아 보고 게임을 하는 것이 전부였죠. 모두 무의미했어요.”

 

그림은 그의 서른 이후를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였다. 지인들로부터 구족화가를 권유받으면서 연필을 입으로 물고 그리는, 생소한 것부터 도전했다. 입이 부르트고, 잇몸에서 피가 나고, 어깨가 뒤틀리는 힘겨운 시간을 거치고 나서 소울음 그룹전에 작품을 내보였다.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던 제가 무엇이든 하나의 결과물을 냈다는 것에 뿌듯했고, 무엇보다 부모님께 항상 미안했는데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의미있었죠.”

그의 작품에서는 파란색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늘과 바다를 유영하는 금붕어와 거북이 등은 임경식 바로 그다. 캔버스 위 화가는 노오란 달이 떠 있는 하늘을 헤엄치듯 날며 자유를 만끽한다. 그림으로 자유로워진 작가가 익숙치 않은 기자와의 인터뷰에 응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에요. 제 이야기, 제 그림을 보고 저와 같은 중증장애인들이 자극받고 세상밖으로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처럼 도와주는 분이 있는, 그런 여건이 있다면 자기 의지가 제일 중요하거든요.”

 

전시회 때 작품 판매도 이뤄지면서 꿈꿀 수 없었던 경제 활동에 더욱 창작욕을 불태우고 있는 그다. 입에서 붓을 내려놓고 나면 벌떡 일어나서 화실을 걸어나가는 장면이 연상될 만큼 에너지가 넘친다.

 

Untitled-3.jpg
▲ 화실 ‘소울음’에는 신체적 한계를 딛고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장애인 화가들이 함께 한다. 사진은 전동 휠체어에 누워서 그림 그리는 최진섭 원장과 화실 전경, 구족화가 임경식씨의 작업 모습.
이와 관련 그를 돕고 있는 활동보조인 윤원일(50)씨는 “정상인이 내가 치유받는 느낌이고 정말 감사하다”면서 “사람마다 아름다움이 있는데 임경식 화가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것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고 자랑했다.

 

이처럼 소울음 화실의 장애인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취미 이상의 의미다. 세상 밖으로 나서는 길이고 때론 적극적인 치료 활동이며,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또 장애를 가져도 여전히 가족구성원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김남우(44)씨가 그 예다. 김씨는 39세에 교통사고를 당해 2년 동안 병원에 있었고, 이후 2년 동안 집에서만 있었다. 그런 김씨의 모습은 어린 두 자녀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 원장을 소개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빠로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고, 그것은 곧 희망”이 됐다.

 

그는 “사고 후 4년을 너무 허비한 것 같다. 화실에 오면 입으로, 누워서만 그리는 더 열악한 상황의 장애인이 많다. 나는 장애라고도 할 수 없다. 그림활동에 매진하며 나를 찾아가는 작업을 계속하겠다. 그렇게 희망을 품고 감사하는 자세를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설명했다.

 

20년 이상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져 서로에게 영감받고 희망을 얻어 가는 소울음 화실의 겉모습은 ‘종합병동’이지만, 그 한계에 굴하지 않는 진정 ‘건강한’ 사람들의 사랑방이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기자에게 최 원장은 “뉴스 보면 답답한 정치, 안타깝고 무서운 사건사고 소식 뿐이다. 이런 흐뭇한 사연이 좀 더 많이 소개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그리고 자랑스레 소개했다. 소울음 회원들의 그룹 전시회가 수원에 위치한 대안전시공간 ‘눈’에서 펼쳐진다고.

 

희망을 품은 작품들을 보며 새해 힘찬 의지를 다져보는 것은 어떨까. 전시는 오는 21일까지 이어진다. 

류설아기자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