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만 하더라도 여성은 남성과 완전히 동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양민 남녀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고, 신랑은 신부 집에 가서 결혼을 하고 일정기간 처가에서 살다가 친가로 돌아오거나, 아예 따로 나가서 가정을 꾸리는 경우가 많았다. 혼인형태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다.
호적에 이름을 기재할 때에도 남녀 순서가 아니라 나이 순서로 하였고, 여성이 호주가 되는 일도 있었다. 재산은 자녀에게 고르게 상속되었고,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부모의 제사를 지냈다.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다. 여성의 재가도 비교적 자유로웠고, 재가해서 낳은 자식도 사회적인 차별을 받지 않았다. 고려의 여성은 제도적으로 거의 차별을 받지 않았고, 이러한 여성의 지위는 조선 전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어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배타적인 동성 마을이 만들어졌고, 개인의 일탈은 허용되지 않았다. 개인은 종중이라는 친족 집단의 일원으로서만 인정을 받았다. 이때부터 부계 위주의 족보를 편찬하면서 다른 집안에 대해서 우월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개방성, 자주성, 진취성, 남녀평등이 고려시대와 조선전기의 전통이었다면, 국제정세를 도외시한 지나친 사대주의, 사상계의 경직성, 비인간적 남녀차별 등은 조선후기의 폐습이었다. 우리사회가 발전하려면 폐습은 과감히 버리고, 우리역사가 품고 있는 건강한 전통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박성순 단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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