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변화 수용에도 때가 있다

증명사진이 필요해서 사진관을 찾았다. 디지털 카메라도 있고 컬러 프린터도 있으니 집에서 촬영하면 저렴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증명사진은 왠지 사진관에서 찍어야만 할 것 같다. 

바로 출력된 사진을 받아들고 가만히 보니 익숙한 모습이기는 한데 어딘가 점점 더 중년아저씨가 되어가는 것 같아 약간은 서글프기도 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변할까’ 하는 생각도 잠깐 하게 된다. 그런데 나만 변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역할도 변하고 직장의 역할도 변하고 사회와 세계도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다. 또한 이를 둘러싼 규범과 제도도 변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만큼 가족들과 식사하는 시간을 갖기 어렵고 직장이 나를 평생 돌봐주길 기대하기도 어렵다. 국내외 상황은 그 어떤 시기보다도 불확실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하는 만큼 나는 잘 변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변화를 수용하려면 많은 노력이 드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변화가 두렵고 귀찮기만 하다.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현재 상황을 바꾸는 변화를 부담스러워 한다. 문제는 작금의 변화가 자신의 외부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본인도 변화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변화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게 아니라 그때는 맞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틀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니 변화는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에게 불편함을 강요한다.

 

정년을 보장받은 교수는 연구성과로부터 자유로운 시기가 있었지만 이제 대학은 정년 보장 후 재심사를 통하여 정년보장 받은 교수도 평가하는 체제를 도입하고 있다. 성과 연봉제를 도입하여 저성과자와 고성과자를 차별 대우하는 제도도 검토 중이다. 

10년전만 해도 대학에서 이런 제도를 도입한다고 했다면 엄청난 반발이 있었겠지만 학령인구의 감소와 대학의 역할에 대한 재정의는 이러한 제도를 기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있다. 조직 내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는 태도에 따라 갈등이 유발되고 있다. 변화를 수용하자는 측에서는 변화에 거부감을 보이는 측을 이해하기 어렵다.

 

앞으로 더 어려운 시기가 올 것이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 답답하다. 변화를 거부하는 측에서는 변화를 수용하자는 측이 섭섭하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모습이 야속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맞고 틀림의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를 이끌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다. 한쪽의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양측이 같이 변화를 어떻게 수용할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 어떤 시대보다도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변화의 수용에 대해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무엇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해 충분한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변화 수용에도 때가 있다.

 

정남호 경희대 호텔관광대학 교수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