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소리, 주인을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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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안에는 높이와 길이가 다른 음들이 서로 엉켜있다. 주로 음표가 많은 데 비해 쉼표는 극히 적다. 음표의 소리가 짜임새 있게 들리는 것은 쉼표가 적절하게 기능하기 때문이다.

둘이 함께 음향을 만들어내지만 쉼표는 음악으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음표가 쉴 때만 인식된다. 쉼표는 아주 길고 음표가 간간히 나오는 음악을 들으면 다소 조바심이 난다. 우리 귀에 배어 있는 익숙함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엘리트 문화에 반발했던 플럭서스(fluxus) 운동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다르게 인식하는 계기를 주었다. 삶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삼은 퍼포먼스가 콘서트의 방식이었다.

백남준의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One’>(1962)은 소리의 개념을 바꾼 작품이다. 연주자가 바이올린을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올리고 5분 여 동안 정지한다. 연주자는 탁자에 악기를 내려치고 청중들은 침묵 속에서 바라본다. 바이올린이 부서지면서 매우 짧은 음향을 생산한다. 아주 긴 쉼표와 짧은 음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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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는 시간을 침묵으로 흘려보낸 것 자체가 음악인 것이다. 침묵 중에 발생한 현장소음과 긴장이 긴 쉼표 안에서 음악으로 치환된다. 청중들은 의도하지 않은 자잘한 소음을 유발하며 음향생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연주자가 될 수 있으며 퍼포먼스의 시간과 방법도 자유롭다. 전통음악의 서정성에 대한 거부의 의미로 바이올린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음악은 생각을 소리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음악의 요소가 될 수 있다. 공연장에서 울리는 음향덩어리에는 음표 외에도 쉼표, 틀린 박자와 음정, 불일치 리듬, 우연한 잡음, 청중들의 소음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유난히 음표만 받아들여 몰입한다. 다른 것들은 소리의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회도 이처럼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잘나고 부유한 음표만 환영 받는 세상은 소리 요소를 잘 구성하지 못한 음악과 같다. 가난한 자와 소수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는 컴퓨터로 작동하는 기계식 무궁동(無窮動) 음악이나 마찬가지다.

 

백남준은 소외된 것들이 주인이 되는 긴 쉼표 ‘시간’을 부여했다. 관습으로 체화된 ‘익숙함’을 일격에 부숴버린 후, 우리를 흔들어 깨우며 묻는다. 이것이 ‘소리’의 출발점인지 아느냐고….

  

주용수 작곡가한국복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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