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다른 삶 살아야”… 냉대·멸시에도 뜨거웠던 교육열
파주 기지촌 여성이었던 P씨(79)는 한때 기지촌 여성들의 권리주장 모임의 자치회장이었다.
6ㆍ25전쟁 참전 미군 병사와의 사이에 ‘바비’라는 아들을 뒀다. 그녀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파주군 임진면 선유리 소재 파주 최초 사립학교인 ‘강석국민학교’를 잊지 못했다. 혼혈아인 바비가 이 학교에 진학, 차별 없는 교육을 받게 하려고 다른 기지촌 여성들과 함께 강석국교 설립과 이후 학교 발전에 직ㆍ간접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이다.
P씨처럼 당시 혼혈아를 자식으로 둔 기지촌 여성들은 피부색이 다른 자식들이 일반학생과 거리낌 없이 어울려 교육받기를 기대했다. 기지촌 여성들의 이 같은 열망은 강석국교 전폭 지원으로 이어졌다.
P씨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일찍이 기지촌 여성이 됐기에 늘 배움에 굶주렸다. 바비가 태어나 강석국교를 다닐 무렵, 미 공병대에 부탁, 학교운동장 터를 단장시킨 것도 강석국교에서 바비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하고픈 엄마의 간절한 희망 때문이었다. 바비가 강석국교 5년을 마치자마자 서울로 유학도 보냈다. 하지만 더 나은 교육을 위해 보낸 학교에서 바비가 ‘혼혈아’라고 놀림을 당했고, 심지어 얻어맞기까지 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바비를 미국으로 입양시켰다.
P씨는 “바비는 현재 연방 공무원으로 미국 국무부에서 근무하고 있다”면서 “그 시절 혼혈아를 자식으로 둔 대다수 기지촌 여성들은 천형으로 생각했으나, 자식만큼은 자신보다 다른 성공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친 것도 사실이다. 그 마음이 미군 후원 속에 학교가 설립되도록 했는데 그것이 강석국교였다”고 회상했다.
14일 파주 미군캠프조사전문인 현장사진연구소(소장 이용남)에 따르면 P씨처럼 파주에 유엔군 주둔시기(1962~1975년) ‘캠프 하우즈’ 등 캠프 11곳에 있던 기지촌 여성은 적을 때는 1천여 명, 많게는 4천500여 명에 이른다. 혼혈인도 백인ㆍ흑인계가 1964~1975년 적게는 150여 명, 많을 때는 170여 명 정도였다.
해주 등 북한지역은 물론, 국토의 최남단인 제주도에서 파주 미군캠프단지에 온 기지촌 여성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멸시와 냉대 등에도 혼혈자식만큼은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파주에는 혼혈아들이 차별 없이 공부할 수 있는 맞춤형 초등학교가 없었다.
이용남 소장은 “기지촌 여성들의 어릴 적 삶은 피폐했다. 당연히 배움도 적었다. 그래서 참전용사와 사이에 낳은 혼혈자녀에 대한 교육적 애착이 강할 수 밖에 없었다”며 “여건상 학교를 설립할 능력은 없었지만 미군에 강력 요청, 혼혈자식들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도록 국민학교 설립을 유도해 성과를 냈다”고 말했다.
이처럼 기지촌 여성들의 절절한 희망을 안고 파주군 임진면 선유리에 설립된 사립학교 강석국민학교(이사장 이모은ㆍ강석국교는 2년 뒤 명신국교로 교명 변경)는 3학급 94명 규모로 지난 1966년 9월 26일 개교했다. 1960년대 국내 사립 초등학교는 서울에 겨우 리라 초등학교만 있을 정도로 희귀했는데, 남북대치 접경지역인 파주에 사립학교 설립은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파주 기지촌 여성들이 강석국교 설립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는 근거는 기지촌 여성들의 증언 이외에도 지난 1966년 6월 20일 파주군 교육청 옛 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파주군 교육청은 강석국교 설립의견서를 통해 “군용지인데 군징발지 해제 신청이 되어 해제됐다”고 기록, 군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군의 절대적인 협조를 받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스쿨버스 운행과 노란 교복이 돋보였던 강석국교 후신인 명신국교를 다녔던 파주시청 간부 K씨는 “한 반에 혼혈아들이 있었다”며 “이들과 수업이 낯설지 않았다. 엄마가 미군을 상대해 부유했던 혼혈아여서 수업을 마치면 태권도도 함께 하고 그들 집으로 놀러 가 미국 초콜릿 등을 먹고 놀곤 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P씨 등 기지촌 여성자치회는 미군에 요청, 강석국교는 물론 명신국교 시절에도 혼혈아와 일반 학생들이 사용할 학습도구 제공은 물론 시설 보수 등 다양한 도움을 주는 등 교육에 열성적이었다”며 “혼혈아들이 좋은 점수를 받아 환하게 귀가하면 감격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강석국교는 단순 학교가 아니라 파주 기지촌 여성들이 자신들의 분신이며 마지막 희망으로 전적으로 의지했던 혼혈아들의 교육을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실천했는지 보여주는 생존에 다름이 아니었다.
기지촌 여성의 염원 속에 혼혈아들에게 기초적인 교육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던 강석국교는 명신학교로 교명이 변경돼 15년 동안 유지됐다 지난 1970년 파주에서 미군이 철수되자 교육과정 부실, 예산집행 혼란 등의 사유로 지난 1981년 5월 7일 문을 닫았다. 지금의 학교 터 주변에는 파주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선유공단이 둘러싸여 있다. 당시 재학생들은 문산동국민학교 등 인근 5개 학교로 보내졌다.
파주=김요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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