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음악은 일반 청중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음향은 아니다. 전개구조도 기존 방식과 달라 마치 음악이 아닌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음악은 조성에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다. 2000년의 음악사에서 장·단음계가 지배한 기간은 200여년에 불과하다. 음악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가에 따라 조성과 무조성의 구분에 의미가 사라진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미국 아이오와 주(州)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금지된 사랑 이야기다. 프란체스카는 사진작가 로버트와 우연히 사랑을 하게 된다. 감정은 기능화성처럼 진행하지 않는다. 부부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자신을 만난다. 잊고 살던 감정이 살아나 자기 삶을 바라보지만 현실은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는 현실의 의무와 사랑의 감정에 충실한 프란체스카를 번민 가운데에 세워놓고,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불편한 판단을 요구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오.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소.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로버트는 그녀와 함께 떠나고 싶어 한다. 프란체스카는, “평생을 바치고 싶어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면서요. 하지만 같이 떠나면 그게 사라져요. 다른 삶을 살려고 모든 걸 버릴 수가 없어요.” 라고 하며 마음속에만 자신들의 추억을 남기고 싶어 한다.
프란체스카가 이상과 현실에 동등한 비중을 둠으로서 영화를 보는 관객은 불편함과 공감 사이에서 고민한다. 고뇌의 양단을 보여주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 때문이다. 도덕은 진리가 아니라 시대의 가치에 따라 가변의 속성을 갖는다. 예술은 현실의 가변성을 가치의 다양성으로 사유하게 한다. 관습과 금기의 벽을 부수는 일이 예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개연성 있는 가정(假定)을 당위로 설정하고 이면의 가치를 은유로 슬쩍 던진다.
서양음악이 무조화성을 담아내기까지는 경계를 허문 진보 작곡가들이 있었다. 초연을 듣고 이해가 되지 않아 야유와 비난을 퍼부었던 I.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같은 작품도 현대고전으로 자리를 옮긴 지 오래되었다. 불륜과 로맨스의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1995년, 당시 국내 흥행에 실패한 이 영화가 이달 중순 22년 만에 다시 관객을 만난다. 예전과 다른 시선으로 프란체스카의 감정을 자신에게 이입하며, 죽은 후 함께 잠들고 싶은 사람이 있기는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떠한가.
주용수 작곡가·한국복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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