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들은 보통 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 사이의 약 천 년을 중세 암흑시대라 부른다. 그러나 중세시대에 관해 실제로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우리가 중세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지식은 대체로 학교에서 배운 ‘유럽의 암흑시대’라는 원론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
실제로 그 시기의 유럽 역사는 종교와 전쟁이 지배하던 역사였다. 따라서 문화, 예술, 인문 등 소프트웨어에 관한 한 그 시대는 암흑시대였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시계획, 건축, 도로, 주택, 광장, 공공시설 등 인간의 실생활에 필요한 하드웨어에 관한 한 중세는 결코 암흑시대가 아니었고, 현대의 인간생활을 지탱하고 있는 토목과 건축 하드웨어의 대부분이 중세시대에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중세시대의 도시와 건축물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어디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지만, 특히 한국인 관광객들이 로마에서 고대문명을 보고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문명과 만나기 위해 건너뛰어 가는 방대한 토스카나 지역에 가면 산봉우리마다 찬란한 중세도시와 마을들이 옛 모습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단지 보존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그곳에서 지금도 살고 있고, 가게와 식당도 열고 있다. 중세 때 마차가 다녔음 직한 마을 길과 중앙광장 등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넓어서, 지금도 사람들이 자동차를 몰고 통행하는 데 별 무리가 없다.
중세마을들이 모두 산꼭대기에 있는 이유는 그 천 년 동안 하도 외침도 많고 자기들끼리의 전쟁도 빈번해서 주민들이 목숨을 지키기 위해 다들 산꼭대기에 가파른 성벽을 쌓아 둘러치고 그 안에 도시와 마을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산꼭대기의 도시나 마을은 대부분 험난했던 중세시대의 것들이고 평야지대의 도시는 대부분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이다. 물론 이 도시와 마을들은 모두 이탈리아 국법에 의해 건물의 변형이나 개축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한 중세도시들은 이탈리아 전역에 수없이 많고 특히 토스카나 지방 도처에 지천에 널려 있지만, 그중 가장 아름답고 마음이 가는 곳은 피렌체 남쪽 약 1시간 지점에 있는 산지미냐노(San Gimignano)라 불리는 작은 도시다. 사람마다 각자 취향이 다르겠지만, 필자로서는 로마보다도 피렌체나 베니스보다도 더욱 정이 가는 곳이 이곳이다.
기원전 3세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이 마을은 훈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했을 때 지미냐노 성인이 이 도시를 구했다고 하여 서기 450년부터 그의 이름을 따서 산지미냐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1199년 독립국가를 형성했었으나, 150년 만인 1348년 토스카나의 강대국이었던 피렌체에 흡수되었다.
다른 중세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가파른 산꼭대기에 높은 성벽으로 둘러쳐진 이 도시는 독립국일 당시 귀족들이 가문의 명예를 걸고 서로 높은 탑을 짓는 경쟁을 벌인 까닭에, 중세 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70m가 넘는 탑이 72개나 있었다고 한다. 있는 돈 다 털어서 탑 짓는 데 탕진한 덕분에 피렌체에게 먹힌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이용준
前 주이탈리아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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