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보면 그런 속성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듯하다. 일리치가 죽었다고 부음(訃音)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서 하는 생각이란 게 누가 그의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것일 뿐, 자기도 언젠가 죽게 되리라든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든가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일리치 자신도 그렇게 살아왔다. 적당히 순수하고, 적당히 타산적이고, 적당히 도덕적이며 적당히 방탕한 삶, 판사가 돼 적당히 인맥을 쌓고 적당히 돈을 모아 적당한 여자와 결혼해 외관상 별 탈 없는 가정을 꾸리며 승진도 하는, 한마디로 꽤 괜찮아 보이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평생 아무도 진정 사랑하지 않았고, 아내와 자식들에게조차 진정한 사랑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고통에 울부짖으며, 아무도 자기를 동정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심적으로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깨달음이 고통을 더 키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그래도 일리치를 구원한다. 마지막 한 시간을 남겨두고 무관심을 넘어 냉담하게 밀쳐냈던 아들이 다가와 손에 입 맞추며 흘린 눈물이 피부에 닿는 순간 폐부 깊숙한 뉘우침이 일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잘못된 삶과도 마침내 화해하며, 죽음의 고통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환한 빛을 본다.
나는 과연 일리치처럼 죽음의 순간에 빛을 볼 수 있을까? 아니, 그에 앞서 나의 하루하루는 일리치의 ‘적당히 괜찮은’ 생활과 다를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하루하루를 좀 더 의미 있고 더 사랑하며 산다면 굳이 죽음의 순간에서야 빛을 보는 게 아니라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은 인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죽음은 그러니까 죽음을 당겨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더 잘 살고 난 끝에 맞이하는 죽음일 것이다.
그리고 좋은 삶이란 또 죽음을 당겨 생각하며 하루하루가 마지막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지성으로 사는 삶이 아닐까.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침묵하고 금기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다. 오히려 밥상머리부터 죽음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인식변화가 필요하다. 죽음을 미리 상상하고 구체적으로 생각하면서 준비할 수 있는 지적능력을 소유한 존재는 아마도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주변인들과 의견을 교환한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권이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 문화를 바꿔 죽어가는 순간, 곧 임종의 순간마저 삶의 질에 포함시킨다면 떠나는 길이 그저 고통과 슬픔과 두려움만은 아닐 것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얼마 전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이 아직은 시행 초기단계라 문제점이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법이 너무 엄격하다보니 관련자들이 ‘엮이기’를 꺼리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다. 선진국처럼 규칙을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꾸는 선행 작업이 있고서야 법의 취지를 살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인식, 죽음 문화에 대한 변화도 필요하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국노년학회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