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초년 시절, 가끔씩 찾았던 장단콩 마을도 눈에 선하다. 한적한 시골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 동네 어귀마다 고향 어머니의 장맛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한 장독대가 그립다. 20~30년 전 기억이다. 팔을 쭉 뻗으면 잡힐 듯하지만 이제는 까마득한 추억이다. 그때만 해도 파주 가는 길은 쉽지가 않았다. 서울에서 부대를 오가는 길만 해도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야만 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이처럼 춥고도 멀게만 보였던 파주, 강산이 두 세차레 바뀌면서 급변하고 있다. 냉랭했던 남북 관계가 해빙기에 접어들면서 파주가 무척이나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파주는 본래 고구려 장수왕 때 파해평사현으로 지칭됐다. 조선 태조 때 서원군과 파평현을 병합, 원평군이라 했고 1461년 파주목으로 승격한 후 1895년 군이 됐다.
파주란 명칭은 조선조 정희왕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희왕후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수렴청정을 한 왕비다. 수양대군의 아내로 시집 왔다가, 수양대군이 왕이 되면서 부부인에서 왕후로 출세한 인물이다. 그는 파평부원군 윤번의 딸로 본관이 파평(坡平)이다.
파주는 파평윤씨 가문 때문에 얻어진 명칭이다. 세조는 계유정난 이후 점차 시국이 안정됨에 따라, 정변 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아내(정희왕후)에게 무슨 도움을 줄까 고민했다. 그러던 중 원평도호부를 파평윤씨에서 ‘파’ 자를 따와 파주목으로 승격시켰다. 왕비(정희왕후)의 친정 마을이었기에 원평도호부가 ‘목’으로 승격됐고, 지금의 파주란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파평 윤씨의 시조는 윤신달이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까지 오른 인물이다. 윤신달의 5세손으로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은 이가 윤관이다. 여진정벌에 17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 함주와 영주 등 9지구에 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족을 평정했다. 그 공으로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에 이르렀다. 파평윤씨에서는 윤관을 중시조로 삼고 있을 정도다.
파주는 수도 한양과 가까워 임진강을 따라 유통이 발달했다. 고랑포와 문산포가 물류 집산지로 유명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임진강이 가져다준 풍요로움에 사람들의 흥겨운 노랫가락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파주가 남북 평화시대, 메카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파주는 지금, 통일경제특구를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민선 7기 파주호 선장에 오른 최종환 파주시장은 이 사업을 1호 공약으로 내걸을 정도다. 파주가 꿈꾸는 미래청사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파주는 이에 부합한 인프라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정전협정과 427 판문점 선언의 중심인 판문점이 위치해 있다.
남북의 자유평화마을이 공존하면서 원초적 자연생태, 근대 문화유산 등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1번 국도를 남북으로 연결하고 경의선 철도와 중국횡단철도(TCR)를 연계하면 유라시아로 확장 가능성도 충분하다. 또 파주는 개성공단과 가장 가까운 도시다. 엘지디스플레이(LGD), 엘지화학, 엘지 이노텍 등 첨단산업 클러스터와 연계한 산업 인프라도 풍부하다.
파주는 통일경제특구로 남북간 새로운 물꼬를 트는 진원지로 기록되고 싶어 한다. 한 발짝 더해 동북아 산업, 물류, 교통벨트 허브로서의 성장까지 기대하고 있다. 그 용트림이 가히 대단하다. 통일경제특구 사업에 대한 최종환 파주시장의 애착은 누구보다 강하다. 시장 재임 초반 성패를 이 사업에 걸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남북협력을 넘어 진정한 통일시대 최일선 전령사를 자처하고 있는 파주시. 최종환 파주호가 그 뜻을 차근차근 실현해 보길 기대해 본다.
김동수 지역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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