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령에 항거해 머리를 깎지 않고,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옷이 다 젖도록 머리를 숙이지 않고 세수를 했으며, 대마도에 끌려갈 때 왜놈땅을 밟지 않겠다며 버선바닥에 부산의 흙을 깔았다는 저항의 상징이 면암선생이다.
그 면암선생의 고향인 포천의 숭모사업회(회장 양호식)에서 30일부터 다음달 3일까지 서거 112주기를 기리는 다채로운 추모행사를 여는 한편 무연고지역에서 잠드신 선생의 묘지이장도 추진하고 있다.
포천이 고향인 필자도 어렴풋이만 알고 있던 면암선생의 면모는 후손들과 후원자들이 꾸리는 면암추모사업회 등의 노력으로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지만 국가지원이 거의 없어 역사적 교육적 가치는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면암은 일부에서 “구한말 위정척사파의 대표적 인물로 국가가 근대화되는데 크게 방해가 된 인물”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경대부의 벼슬도 거부하였고 고종으로부터 현금 3만냥과 백미 300섬을 받았으나 국고로 반납한 조선조 강골선비였다.
서원철폐와 경복궁중건중단 당백전제도폐지 병자수호조약무효 등의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실각을 이끌어 냈다.
을사늑약폐지 을사5적처단 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74세의 나이에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전북 정읍, 순창, 장성 등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고 만다. 당시 조선통감인 이토오 히로부미가 “대감! 제자 13명과 함께 대마도로 호송하는 약식판결을 내리겠소”하자 “이 못된 놈을 봤나. 나는 너의 재판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일갈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면암이 운명하기 직전 대마도에서 고종이 있는 서울을 향해 재배를 올리고 의병부장 임병찬(전 낙안군수)에게 대필을 시킨 글은 참으로 숙연하다.
‘신이 이곳에 온 이래 한술의 쌀도 한 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지라 차마 먹고 입고, 배를 더럽힐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먹기를 거부함으로써 죽음을 택하기로 하였사옵니다. 신의 나이 74세, 죽은들 그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후략)’
면암선생께서 대마도 감영에서 굶어서 순국했다는 소식을 중국 뤼순감옥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의사께서는 “최면암은 도끼를 지니고 대궐에 엎드려 병자수호조약을 무효로 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목을 베라고 하는 등 참으로 국가를 걱정한 선비였고 중국역사상 충절의 상징인 백이(伯夷) 숙제(叔齊)이상의 인물이다. 백이 숙제는 주나라 음식을 먹지 않고 고사리만 먹다가 죽었지만 최선생은 적국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니 고금 제1의 인물이다”라고 탄식했다(뤼순감옥 수사보고서)는 것이다.
이 같은 충의정신은 훗날 독립운동의 정신적 근간이 됐다.
1945년 해방되고 환국한 백범 김구선생은 첫 행사로 상해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충남 청양의 모덕사를 찾아 면암선생께 ‘고유제문(告由祭文)’을 드렸다. 면암정신이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한 것이라는 반증이다.
평생을 수기치인(修己治人) 경세제민(經世濟民) 살신성인(殺身成仁)을 실천한 면암선생의 유언은 죽어서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순국후 운구가 부산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다 애도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자 당황한 일제는 선생의 유해를 논산에 가매장했다가 2년 후 예산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유족들과 숭모회는 면암선생이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생가터 인근에서 영면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올해 면암문화제는 30일 면암추모시 낭송회를 시작으로 11월1일 학술발표회, 3일 오후2시 포천시청을 출발하는 거리행진, 오후3시 포천여중 체육관에서 제112주년 추모식과 면암 UCC경연대회 면암국악제 등으로 다채롭게 펼쳐진다.
양호식 숭모사업회장은 “면암선생은 한 점 부끄럼없이 당당한 삶을 사셨고 올바름과 진실을 좇아 이와 어긋나는 언행을 하지 않으신 분으로 우리시대 충(忠) 의(義) 효(孝)의 귀감이 되시는 분”이라며 “포천으로 묘역도 옮겨와 이 시대정신으로 높이 추앙해 역사교육의 산실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종희 제16·18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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