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점을 칠 것인가, 시중(時中)을 읽을 것인가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할을 맡았던 이정재의 대사이다. 외국인들은 대개 우리나라를 주역(周易)의 나라로 이해한다. 다수의 유력 일간지에 매일 빠짐없이 ‘오늘의 운세’가 실리고, 그 바쁜 출근길에도 자신의 운세를 확인하는 광경을 보면 단언컨대 주역의 나라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일까. 서여의도 정치권에도 어김없이 주역이 등장한다. 유교 삼경의 하나인 주역(역경)에는 건괘(乾卦)의 육효(六爻)의 뜻을 설명한 효사(爻辭)가 있는데, ‘잠룡물용(潛龍勿用)’을 비롯해 ‘현룡재전(見龍在田)’, ‘비룡재천(飛龍在天)’, ‘항룡유회(亢龍有悔)’의 단계로 용의 승천하는 기세가 표현돼 있다. ‘잠룡’은 물속에 있는 단계이고, ‘현룡’은 땅에 올라와 비로소 세상에 자진을 드러내는 단계며, ‘비룡’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뜻하며, ‘항룡’은 더는 오를 곳이 없는 마지막 단계이다.

이 가운데 언론에서 유력 여야 대선주자에게 가장 많이 비유되는 단계는 잠룡물용과 항룡유회일 것이다. 잠룡물용은 물에 잠겨 있는 용은 쓰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더 배우고 힘을 길러야 할 때 자신의 준비 됨을 잊고 설치다가 낭패를 본다는 교훈이 담긴 말이다. 아직 때가 아니므로 덕을 쌓으며 조용히 때를 기다리라는 가르침이다. 항룡유회는 하늘 끝까지 올라가서 내려올 줄 모르는 용은, 즉 권력에 미련을 두면 후회만 남는다는 따끔한 충고를 담고 있다. 모든 효사의 가르침은 덕을 베풀고, 힘과 지혜를 기르고, 대업을 이루고, 권력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다. 여기서 공통적인 핵심은 바로 ‘때를 거스르지 않는 것, 즉 때를 아는 것’이다. 이 점은 유력 대선주자에게 혹은 최고의 권력자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언론의 보도 행태에서 나타난다. 유력한 대선주자로 거명되는 후보를 향해 잠룡이라 부르지만 앞서 제시한 주역에 담은 덕, 겸손, 지혜, 대업 등에 대한 기사는 쉽게 볼 수 없다. 한낱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점치는 점복(占卜)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요즘 들어 언론들은 ‘잠룡들의 수난’이라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내일에 대한 걱정이 많은 국민은 ‘잠룡들에 대한 검증’으로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론들은 누가 왕이 될 상인가에 관심이 있다면 국민은 누가 더 많은 덕과 능력을 쌓고, 국민과 소통하며 대업을 이루고자 노력하는지, 겸손을 잃지 않으며 소명을 다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할 것이다. 언론을 민주주의의 미드필더라고 말하곤 한다. 대의 민주주의는 비행기에 탑승한 승객 중 주기적으로 기장을 선출해 임무를 맡기는 막중한 책임감이 수반된 제도다. 따라서 국민의 권한을 대행하고자 하는 대표자에 대해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자질과 정책에 대한 언론의 감시와 견제가 가능해야 한다. 언론은 누군가의 아우라를 위해 백 개의 형광등이 되는 몰지각한 행위가 아닌 시민이 알아야 할 정보를 제공하고 우리 사회의 공기(公器)로써 기득권과 권력 감시 책무를 다해야 한다.

한국의 독자들은 오늘의 운세를 심심풀이로 보기도 하지만 오늘의 운세를 읽으며 유념해야 할 것들을 점검한다. 오늘의 운세, 주역의 독자도 그러할진대 언론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차기 대통령을 점치는 ‘점복’의 재미에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것에 현혹되지 말자. 잠룡물용과 항룡유회의 교훈을 잊지 않게 정치권력에 경고하고 자질과 정책에 대한 감시와 견제의 기능을 늦추지 말자. 이는 민주시민에게 부여된 권리와 의무이며 언론을 넘어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점 또한 명심하자.

오현순 한국매니페스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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