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의 고향은 용정, 예전에 북간도라 불리던 곳이다. <별 헤는 밤>에서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를 노래한 바도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용정 안에서도 명동촌(明東村)이고, 이곳은 김약연 선생이 함경도에서 여섯 가문을 이끌고 조국의 미래를 도모하려고 설립한 마을로, 간도 독립운동의 본산과도 같았다. 독립운동가치고 명동촌에서 밥 한 끼 먹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명동촌은 지금도 윤동주 시인과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을 기념하고자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이다.
명동촌을 일삼아 찾은 사람들은 윤동주의 생가에 이르러 꽤 놀라곤 한다. 대문 옆에 ‘중국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라고 크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에게 중국조선족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으니 우리의 값진 보물을 중국에 빼앗긴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 언론에서도 이를 두고 소수민족의 역사를 제 나라의 것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해석하며 불편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최근 문익환 목사의 통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통일의 집’을 방문하면서 이 문제를 달리 보게 되었다.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의 친구로 명동촌에서 함께 자라고 중등학교까지 동고동락한 사이다. 윤동주와는 비슷한 시기에 일본 유학을 가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극에 달하자 일본에 유학 중인 학생들이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윤동주는 일경에 체포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지만, 문익환은 우여곡절 끝에 고향 북간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문익환은 기독교도에 대한 공산주의의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고, 한신대학교의 교수로, 성서번역자로, 독재에 맞서는 통일의 투사로 살아왔다. 이렇듯 문익환 목사가 한국인으로 우리나라의 역사 속을 살아오는 동안 일제 강점기에 유명을 달리한 윤동주는 영원히 북간도의 사람이 되었다. 명동촌의 사람 중 북간도에 남은 사람들 또한 그대로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그저 남하할 것인가’, ‘머무를 것인가’였지만, 결과는 국적의 변화로 나타났다. 이런 역사를 보면 대한민국 국민과 중국 조선족 사이에 엄청난 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또 북간도로 떠나기 전 명동촌 사람들의 고향은 함경도 회령이었다. 그들의 친척들은 북한의 주민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문익환 목사가 북한의 초청을 받아 갔을 때 다수의 친척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집안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간도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윤동주나 문익환은 북한의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작은 변수들이 한집안의 사람들을 대한민국 사람으로, 조선족으로, 북한 인민으로 나누어 놓은 셈이다. 한국 국적, 중국 국적, 북한 국적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러고 보면 30년 전에는 과격해 보였던 문익환 목사의 방북도 이해가 간다. 북간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입장에서 남과 북, 만주의 차이를 느끼기 어렵고, 남과 북이 하나라는 강렬한 믿음이 앞섰을 테니까.
그러니 윤동주의 이름 앞에 새겨진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라는 명칭에는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적 현대사가 지닌 아픔이 깃들어 있다. 동시에 우리의 현대사를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라는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통일이란 단순히 남북 체제의 결합이 아니라, 민족 감성의 세심한 재결합이어야 한다는 당위이기도 하다.
최민성 한신대 한중문화콘텐츠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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