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끝난 G20 정상회의에서 일본은 자유무역의 기본 원칙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원칙이 단 이틀 만에 사라지고, 한국을 대상으로 한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조치를 꺼내들었다. 이를 두고 일본의 보수언론에서조차 이율배반이라는 비판과 함께 일본 기업에도 적지 않은 악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반도체 업계가 수출하는 물량의 절반 정도는 한국이 구매하고 있으니 일본 반도체 업계의 타격은 불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일본이 수출규제에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아베 일본 총리는 한국과의 신뢰훼손을 이유로 관리강화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압력을 행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한국 언론은 일본의 참의원 선거와 연결 짓고 있지만, 경제운용에 실패하고 있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수출규제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작년 대법원의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기업의 배상판결에서 비롯됐다며 원인제공자는 한국이라는 어느 언론의 사설에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글로벌 패권을 건 자존심 대결로 불리는 미중 무역전쟁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여러 가지 상황을 산정한 시나리오와 비상계획(contingency plan)을 준비하고 선제타격으로 전쟁을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의 수출규제도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국의 부상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미국과 마찬가지로 국운을 걸고 한국과 전면전을 벌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실 일본은 오래전부터 한국의 세(勢)를 꺾고 싶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일본의 혐한(嫌韓) 기류는 ‘K팝 열풍’이라 하는데, 이와 같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공포는 문화 트렌드로 ‘거인 붐’을 불러일으켰던 극우 성향의 이사야마 하지메의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서도 잘 나타난다. 지난 2009년부터 연재를 시작했던 ‘진격의 거인’에서는 나약하지만 싸워야만 살아나갈 수 있는 존재로 일본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초대형 거인이 등장하는데, 거인의 정체 중 하나는 문화산업 등으로 부상하는 한국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은 조급했다. 그래서 실수했다. 전쟁을 걸어온 시기가 잘못됐다. 싸움을 걸려면 오래전에 걸어왔어야 했다. 이번 일로 일본은 한국의 잠재적 위협이라는 실체만 확인해줬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미국 빌보드 차트를 휩쓸며 비틀즈에 비견되는 것이 일본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G20 행사장에서 불거진 ‘일본 패싱’ 논란과 세기의 만남이었던 남북미 정상회담은 일본의 조급함을 더욱 부추긴 것 같다.
한일 간의 전면전은 어쩌면 이미 시작됐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냉정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상대의 실수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더욱 조급하게 만들어야 한다. 차분하게 산업경제의 기초를 다질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외교력 문제로 화살을 돌리려는 당리당략적 접근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번 사태를 아베의 정략(政略)이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분풀이 정도로 보는 순진한 생각도 버려야 한다. 손해가 크더라도 일본은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어쩌면 이 싸움은 일본이 국운을 걸었던 것처럼 우리도 국운을 걸어야 하는 싸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현순 한국매니페스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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