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반, 아주 어린아이 때 홍콩에서 살았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부친께서 꼼꼼히 정리하신 컬러 사진을 통해 홍콩에서의 4년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지금 봐도 홍콩의 부(富)는 대단했다. 막 홍콩에 자리 잡던 터라 집이 잘 사는 편이 아니었는데, 사진 속의 아이는 시리얼을 우유에 타 먹고, 고급 아이스크림 브랜드의 하드를 맛보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이제 막 보릿고개를 벗어난 가난한 나라였지만 홍콩은 영국의 직접적 영향 아래 있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으니 그럴만했다. 여러 사정으로 가족이 국내로 돌아온 후, 사진은 흑백으로 바뀌었고 홍콩에서 누리던 모든 것은 우리나라에서 10년, 20년 후에나 만날 수 있었다. 홍콩은 별세계였다. 아시아이면서 동시에 아시아가 아닌 어떤 곳, 가볼 수 없는 해외 선진국을 같은 인종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 후 다시 홍콩을 가보게 된 것은 1989년 대학생 체험단의 일원으로 중국 탐방을 하게 되면서였다. 아직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라 중국으로 직접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일 보편적인 방법은 홍콩을 통해 우회하는 것이었다. 2층 관광버스를 타고 돌아본 홍콩은 더욱 화려한 곳이 되어 있었다. 마천루들이 연이어 들어선 곳에서 화려한 야경이 빛나고 디즈니랜드를 비롯한 엔터테인먼트 시설들이 매혹하고 있었다. 여전히 홍콩은 아시아에서 가장 화려한 자본주의가 빛나는, 세계와 중국을 연결하고 세계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독특한 제3지대였다.
1997년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이 제3지대의 성격은 상당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약속하며 홍콩의 체제를 인정했지만, 본토의 정책이 양제보다는 일국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광둥어 대신 중국 표준어가 중시되기 시작했고, 상호 간 교류 의존도가 되돌릴 수 없이 커졌고, 수많은 본토인과 본토의 문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홍콩의 삶 속으로 침투했다. 가장 가시적인 일국의 상징은 홍콩과 주하이를 잇는 강주아오대교(港珠澳大橋)일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홍콩과 광둥성을 엮어 통일적 경제체제를 만들겠다고 선언해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을 감수하면서 홍콩과 광둥을 직접 연결하는 다리를 놓은 것은 경제적 이익 못지않게 상징적 이유도 커 보인다. 홍콩은 이제 대륙의 ‘일부’다.
홍콩의 범죄자를 본토로 송환할 수 있는 범죄인인도법안 때문에 대규모 시위가 그치지 않고 있다. 법 자체에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 시위의 배면에는 홍콩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홍콩인들의 열망이 숨어 있다. 근대의 역사 속에서 좋든 싫든, 긍정적인 역사에 의해서건 부정적인 역사에 의해서건, 오랜 세월 형성된 홍콩만의 삶의 방식, 특성 등이 갈수록 부정되어간다는 공포가 송환법에서 폭발했다.
지역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옹호하는 것은 시대의 정신이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선정이라는 형식을 통해 다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지역의 정체성을 유지토록 노력하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오랜 세월 유지되어온 홍콩만의 색깔이 문화다양성의 가치 아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아시아의 제3지대로서의 가치를 살리는 것이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하리라 본다. 그러고 보니 홍콩은 영국에서 이곳을 부르는 이름이고, 샹강은 본토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이곳 사람들 스스로 부르는 이름은 형꽁이다. 형꽁은 형꽁만의 뉘앙스가 있다.
최민성 한신대 한중문화콘텐츠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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