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조상은 신숭겸입니다.”
신 고바르드 씨(한국이름, 신기원)는 나와 대면하자마자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이 자신의 뿌리이며 자신은 평산 신씨 37대손임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면서 자신의 가족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그만큼 민족의식이 투철하다는 방증이다. 신 씨의 할아버지는 경술국치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해인 1910년, 일가 식솔들을 이끌고 함경북도 무산에서 두만강을 건너 황량한 벌판, 러시아 연해주 한힌동이란 마을에 정착한다. 이곳에서 조선사람들 400여 명이 집단을 이루면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던 중에 1937년 소련 스탈린의 조선인에 대한 중앙아시아 집단강제이주로 인해 우즈베키스탄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이때 농사짓기를 잘하는 우리 조선인들은 계절농업노동자로서 러시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그 가운데 신 씨의 가족도 포함되었다. 신 고바르드 씨는 그의 어머니가 밭에서 일하는데 갑자기 산기를 느껴 급히 병원으로 옮겨서 낳았다. 하마터면 밭에서 낳을 뻔했다. 명이 긴 아들인 셈이다.
1973년 신 씨의 아버지는 다시 키르기스스탄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된다. 신 씨의 나이 두 살 때였다. 신 씨는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켁에서 성장하면서 키르기스스탄 최고의 대학인 키르기스국립대학교 법학부와 키르기스스탄 외교부 산하 외교아카데미를 졸업하며 2004년에는 약관 서른 살의 나이에 비쉬켁 시의 시의원으로 선출된다. 그에 대한 키르기스스탄 고려인 동포사회의 열성적인 성원과 고려인 동포들의 성실성과 근면성을 높이 평가한 키르기스스탄 사회의 여론이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지금도 키르기스스탄 고려인협회 부회장으로 활약해 오고 있다. 신 씨는 현재 키르기스스탄에 다섯 개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야심찬 사업가이기도 하다. 한국화장품, 라면 등의 식료품 등을 수입하여 키르기스스탄 대형 유통마트에 독점공급하고 있다.
신 씨는 무엇보다도 한국과 키르기스스탄 양국 간의 우호협력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기를 누구보다도 바란다. 그 힘을 바탕으로 약 2만 명에 이르는 우리 키르기스스탄 고려인 동포 사회에서 당당히 국회의원이 배출되는 등의 위상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키르기스스탄에 진출하여 공장을 세우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이때 고려인 동포들이 연결고리 역할을 충분히 해내줄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우리 고려인 동포들은 키르기스스탄 사회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한국과 키르기스스탄과의 경제교류 협력에서 원활한 촉매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 한국 외교부는 키르기스스탄 주재 한국대사관에 고려인 동포 출신의 명예영사를 임명해서 활약할 수 있기를 주문했다.
장준영 전 경기신용보증재단 상임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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