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재촉하는 첫눈이 내리는 이맘때 고향집 언덕에 푸른 청대 숲이 그립다. 낮이면 햇살을 잘게 부수어 숲 안마다 보석처럼 박고서 작은 동박새 이별이 아파서 서걱서걱 낮은 울음을 삼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람이 전하는 말 듣고자 이리저리 긴 몸을 뉘이며 애타던 대숲에도 하얀 겨울이 앉았을까? 문풍지 울리는 바람 따라 기억은 긴 시간의 터널을 거슬러 간다.
세상엔 수천 종의 나무가 있을 텐데 유독 대나무는 우리네 정서와 궤를 같이하는 겨레목이 아닐까. 왜적과의 전장에서 활이 되어 지키는 나무였고 동학혁명의 농민군에겐 죽창으로 변신해 목숨보다 굳은 의지를 이어주었다. 어디 그뿐이랴. 빨랫줄을 지탱하거나 붉은 홍시를 따던 것도 대나무였으며 화첩으로 옮겨지면 충절과 기상을 뽐내는 것도 대나무였다.
대나무는 아마도 두께보다 키가 제일 큰 나무일 것이다. 과연 그리 높이 자라는 연유는 무엇일까? 하도 궁금해서 대숲에 서서 물었던 기억이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곧은 이유가 아닐까. 대부분 나무들은 불규칙하게 형상을 하지만 대나무는 모두 하나인 듯 쭉쭉 뻗은 모양새가 닮았다. 고로 창공의 한점을 찍어내듯 지향점이 뚜렷하여 삐뚤어 지지 않고 자람이 그리 높이 크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인간사에서도 어딘가에 도달하려는 목적성을 뚜렷이 정하고 살아내는 자의 나중이 웅대하지 않은가.
둘째는 속이 텅 빈 이유다. 속을 깨끗이 비워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미리 알아 쉼 없이 흔들리는 공명의 도를 깨우쳤기 때문은 아닐까.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열고 들어주는 공감력이 인간의 성장에도 소중하다. 사람도 자신을 비우듯 열고 타인의 얘기에 공감해 내는 능력이 중요하지 않은가.
셋째는 짧은 마디다. 마디가 많아서 키가 크다는 것은 어찌 보면 역설이다. 대나무는 한 뼘이 클 때마다 마디를 짓는 성장통을 아끼지 않는다. 만약 아픔을 견디지 못하거나 두려워 마디를 짓지 않았다면 제일 큰 나무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갖은 시련을 만나게 되고 그것은 더 큰 시련을 이겨내는 동력이 되곤 한다. 마디에 마디를 짓는 것처럼 포기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은 성공으로 가는 성장통에 불과한 일이다.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무수한 사람은 어떤가? 갖가지 형상의 나무를 닮았지는 않은가. 고로 나는 어떤 나무를 담아내며 살아가고 있는가. 만고풍상이 끊이지 않는 저 숲에서 각자의 모습을 택하여 존재하는 나무에 묻고 스스로 답을 해본다.
궁핍과 더불어 육신의 고난에도 좌절과 포기를 넘어 더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해 내는 지도자로 성장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대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는 사회가 된다면 지금 건너는 작은 성장통은 기꺼이 선택해도 될 것이다.
유재석 경기도일자리재단 상임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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