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새로운 길’과 ‘대환상’

2020년 경자년(庚子年)의 새해 새 아침이 밝았다. 경자년의 ‘경’(庚)은 십간(十干)의 일곱 번째 오방색으로 흰색에 해당돼 흰 쥐띠 해로 불린다. 쥐가 우리 생활에 끼치는 해는 크지만 쥐는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본능이 있다. 쥐 중에서도 흰쥐는 우두머리 쥐로서 매우 지혜로워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데다가 생존 적응력까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침을 열어보니 영특한 우두머리 흰쥐가 아닌 ‘대환상’에 빠져 있는 흰쥐도 있는 것 같다.

김정은은 지난 연말 29년 만에 4일간 주재한 북한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끝까지 추구한다면 비핵화는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정면돌파전’ 노선을 내세워 핵·미사일 등 전략무기의 지속적인 개발을 천명하고,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중단 약속의 파기도 위협했다. 겉으론 ‘새로운 길’이라지만 실상은 ‘핵ㆍ경제병진 노선’으로 회귀한 낡은 길의 답습이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하자 탈냉전이 도래하고 미국이 전 세계의 질서를 주도하면서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미국은 세계화를 통해 미국의 가치를 전 세계 특히 화약고인 중동지역으로 확산시켜 세계평화를 유지하려 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까지 벌였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분쟁과 테러만 양산됐다. 미국이 중동의 사막과 산악에서 국력을 소진하고 있는 동안 중국은 급부상했으며 러시아도 강해졌다. 미국인들도 세계경찰에 대한 피로감에 지쳐버렸다.

미국은 30여 년이 지나면서 그것이 ‘대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괴짜 같지만 영악한 트럼프는 이를 간파하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쳐 대통령에 당선됐다. 석학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명저 ‘대환상(The Great Delusion)’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2020년 세계는 대환상에서 깨어나고 있다. 세계화(Globalization)의 물결은 퇴조하고 민족ㆍ국가주의(Nationalism)가 부상하고 있다. 열강들은 이상이나 가치보다는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우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도널드 트럼프(미국), 시진핑(중국),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아베 신조(일본), 보리스 존슨(영국) 등 열강들의 지도자들은 모두 민족ㆍ국가주의자들이며 스트롱맨들이다. 이미 국제정치는 미-일-영 대(對) 중-러의 제2냉전구도의 ‘새로운 길’로 회귀하고 있으며, 미-중 패권경쟁으로 표출됐다.

문제는 2020년대 제2의 냉전구도가 한반도에서 충돌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으며, 미국과 중국이 한국으로 하여금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인사에서 “평화는 행동 없이 오지 않는다”면서 “남북 상생번영의 평화공동체”를 역설했다. 또 “남북관계에서도 더 운신(運身)의 폭을 넓히겠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북한은 4일간 계속된 회의에서도 남조선을 거명조차 하지 않았고 평화 대신 핵미사일의 ‘새로운 길’을 결단했다.

국가 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이상주의(Idealism)는 세계화 시대에서는 빛을 발했다. 그러나 2020년은 자국의 힘에 바탕을 둔 현실주의(Realism) 국가주의가 부상하고 있다. 세계도 북한도 대환상에서 깨어나 ‘새로운 길’로 가고 있는데 우리만 평화에 함몰돼 있다면 ‘대환상’이다. 최고로 영특한 우두머리 흰쥐가 절실히 필요한 경자년 아침이다.

김기호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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