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에 대한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 불경 속전에 묘사된 아귀와도 같다. 아귀는 배가 산처럼 크고 목구멍은 바늘처럼 좁아서 늘 배고프고 목마른 고통을 겪는 존재이다.
요즘 말로는 ‘자낳괴(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인데, 돈 앞에서 자기의 신념이나 행동양식을 언제든 바꾸는 황금 유일론자들이 우리 사회의 공공이익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역시나 많이 목격한다. 자기 이익을 위해 잘못을 저지르고도 적반하장으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자도 많다. 이를테면 염치가 없는 셈인데, 춘추전국시대 순자는 이렇듯 염치가 없이 밥만 축내는 자는 무거운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실 자본주의의 지향점은 무작정의 황금 숭배에 있지 않다. 독일의 경제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나에게 내린 재능을 발휘해서 이익을 크게 낼 때 신께서 기뻐하며, 모은 자본은 나의 것이 아니라 사회에 환원해야 할 공공의 것’이라며 청교도적 덕목이 근대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왔다고 규정하였다. 신학적 논의의 여지는 있지만 베버의 규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염치없는 탐욕, 성찰 없는 자본주의는 그저 징그러운 아귀, 이 시대의 추악한 자낳괴를 수없이 생산하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부작용이 많이 나타났다.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의 배후도 결국 인간의 탐욕이었다. 사람의 생명이나 안전보다 황금을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감염속도가 심상치 않다. 감염병 대유행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 와중에 사회 안전을 해치며 이익을 구하는 사람이 등장하였다. 정약용은 인간은 선을 좋아할 수도 악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도덕성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성기호설을 주창하고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려면 교육이나 제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 바 있다. 요즘 같은 비상시국에 아귀들의 탐욕이 준동하지 않도록 엄정한 제도를 신속히 완비할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우수하면서도 사명감이 있는 인적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살벌한 현장에서 헌신하는 의료진, 공공기관 종사자들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최근 상황은 폐쇄된 도시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염되어 다른 사람에게 페스트를 전염시킬 수도 있는, 모든 이가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우연한 보편적 폭력상황을 묘사한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전염병과 싸우는 인간의 의연한 모습은, 인간에게서는 경멸보다는 찬양할 점이 많다는 문장에 끝내 동의하게 한다.
언제 끝날지도 얼마만큼의 피해를 볼지도 모르지만 코로나19는 인간다운 인간들에 의해서만 정복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 퍼지는 자낳괴 바이러스 역시 그러하다. 막스 베버의 경고대로 자본주의 문명이 낳은 최후의 인간인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주의자’가 양산된다면 우리 미래는 끔찍한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자낳괴 바이러스를 박멸하려면, 인간의 탐욕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도록 교육과 제도를 신속히 정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선각자 정약용과 소설 페스트가 주는 가르침이다.
김성훈 손해보험협회 중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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