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은 2017년 1월4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됐다. 2018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됐다. 민속경기로만 알고 있던 씨름은 국내외적으로 역사성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연구진들은 씨름의 역사 추정 근거로 고구려 ‘각저총’과 ‘장천1호분’을 들었다. ‘각저총’을 4세기의 고분으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5세기 고분으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북한에서는 4세기 고분으로 주장한다. 이 고분의 벽화에는 씨름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려사(高麗史)에는 ‘충혜왕(忠惠王) 원년(1330년), 왕이 나라의 중요 업무를 폐신(嬖臣) 배전과 주주 등에게 맡기고 날마다 내수(內竪)와 함께 씨름(角力戱)을 하는 바람에 상하의 예의가 없어져 버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기록도 고구려 벽화보다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연구진들은 더 오래된 사료를 찾아야 했지만, 고구려의 ‘각저총’과 ‘장천1호분’보다 더 오래된 사료를 찾지 못했다.
서울대학교 나영일 교수의 ‘고대ㆍ중세 씨름의 역사’ 연구에 따르면 “중국에서 편찬한 ‘오천년중국체육’과 ‘도설중국고대체육’, ‘중국고대체육도록’에서도 5세기에 만들어진 고구려의 ‘각저총’과 ‘장천1호분’ 같은 벽화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했다. 고구려의 ‘각저총’과 ‘장천1호분’은 그야말로 매우 소중한 고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중국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열전(東夷列傳) 편을 보면 씨름과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순제(順帝) 원년(AD 136)에 부여왕(夫餘王)이 경사에 와서 만나니, 순제는 궁중 뜰에서 연주하는 황문고취와 각저희(角抵戱)을 부여왕께 관람하게 하고 돌려보냈다’라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각저희(角抵戱)는 씨름을 일컫는 말로 고려사와 정조실록(正祖實錄)에도 기록돼 있다. 그러나 후한서의 원본은 모두 소실되었고, 의전행사로 중국씨름을 부여왕께 보여준 기록에 불과하다. 단지 명칭만 같을 뿐 우리 씨름이 아니다.
물론 우리 씨름과 유사한 유물은 다른 나라에도 있다.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수메르레슬링청동술잔(BC 2800)’과 중국 전국시대(BC 475~AD 221)의 ‘청동투조동패’, 그리고 북위시대(AD 386~534)의 산시성 대동출토물에서 발견된 ‘벼루에 새겨진 각저도’는 우리 씨름과 유사하기 때문에 향후 상호 연관성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씨름은 모든 인류가 생존하면서부터 자기보호 수단으로써 행해져 왔다. 과거의 기록과 사료가 부족하여 더 오래된 역사를 추정하지 못했을 뿐, 실전적인 씨름의 역사는 학자들이 사료에 근거해 주장한 1천600년보다는 더 오래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그 아름답고 소중한 씨름을 잘 보존하고 전승하는 것이 씨름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공성배 세계용무도위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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