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코로나 시대,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 코로나19는 인류와 영원히 함께 갈 것이라는 예언들 속에서, 함정에 빠진 기분으로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런 때에 먹고 사는 일이 문제지 예술이 무슨 배부른 타령인가 하는 타박과, 절로 고개를 드는 자괴감 속에서도 예술인들과 그 언저리의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전 세계적인 상황이 이러할진데 미술계라고 해서 별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 같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홈쇼핑채널에서는 그림 좀 그린다는 연예인들이 호스트로 출연해 애매한 작품들을 모호하게 설명하며 렌탈을 권유 중이고, 온라인으로 실행된 유수의 해외 아트페어들이 의외로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하지만 미술작품을 사고파는 영역 밖에 있는 우리, 그러니까 시간을 들여 미술관을 들러 작품을 감상하고 작품의 심연에서 얻은 정화의 힘으로 일상을 살아왔던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우리나라 뿐 아니라 해외의 미술관들에서도 온라인으로 버추얼 리얼리티(VR) 화면을 제공하거나 각종 무관중 이벤트로 어떻게든 전시된 작품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명망 높은 미술관들의 온라인 전시를 아무리 돌아보아도, 모니터 안에 들어가 작품을 클릭클릭 가까이 들여다보아도, 마우스로 360도를 휘휘 돌아 지나온 길을 다시 가 보아도 한계가 명확한, 막다른 골목에 발걸음이 막힌다. 아니, 나의 발은 실제로 한 걸음도 작품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다. 무려 2020년에 이런 식으로 미학적 난관에 봉착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진기술이 보급되었을 때 미술계의 혼란이 이런 식이었을까. 실물의 박을 떠서 이차원 평면에 얹어놓은 것 같은 ‘사진’이 그림의 존재가치를 흔들었던 20세기 초에, 발터 벤야민은 유일무이한 진품의 미술작품이 가진 가치를 아우라라고 설명하였다. 구글 아트 프로젝트에서 모나리자를 촬영하여 실제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선명한 화면을 보여준다 해도, 모나리자 앞에 선 기묘한 경험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루브르미술관에서 모나리자의 크랙을 보존수복하기 위해 일정 기간 빈 벽을 남겨두었을 때, 작품이 걸려있던 빈 벽이라도 가서 보겠다고 관객이 우글거렸다는 이야기는 그저 어리석은 관객들을 탓하기 위한 농담이 아니다.

하나의 작품과 마주하여 길고 고요한 시간을 보낸 후 세계를 바라보는 각도가 조금 달라졌던 경험, 발걸음을 옮겨 다니며 작품의 여기저기를 살피고 해석의 단서를 찾아보았던 경험,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진지한 표정을 구경하는 경험, 전시장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작품 앞에서 피곤한 눈을 감고 살짝 졸아도 좋았던 그런 경험 말이다. 그것이 미술관에서 실제로 할 수 있는 가상으로는 불가능한 경험이다. 그래서 이 재난의 시기가 얼른 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각종 암울한 예측과 전망 속에서도 인류는 늘 이런 재난을 맞고 극복해왔다는 근거 있는 희망을 가져본다. 또한 아직 끝나지 않은, 언제 끝날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이 사태 속에서 건진 게 없지는 않다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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