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반려동물로 한껏 선호되는 고양이, 한데 필자는 고양이에 대한 상당 거부감이 있다.
우선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그 눈이 무섭다. 또 밤새우는 울음도, 아기의 슬픈 그것과 비슷해 한껏 괴기스럽기만 하다.
고양이에 대한 필자의 편견은, 막연한 미신에 따르기도 한다. 오래전 한 소설에서 살아있는 고양이를 가마솥에 찌는 증묘(烝猫)를 알게 됐다. 실상 고양이에 대한 가련함이 우선해야 할 테지만, 그 장면에서 독살스러운 광인(狂人)의 눈빛이 고양이의 눈빛으로 혼동됐다.
부정적 편견의 또 다른 계기는, 일본 고양이다. 일본에서는 앞발을 치켜세우고 마른 세수를 하는 고양이의 작태가, 손님을 부르고 재복을 불러온다는 속설이 있어왔다. 이를 바탕으로 도자기 마네키 네코가, 일본 도처에서 요란하게 선호돼 왔다. 특히 고양이에게 일본인 특유의 감춰진 혼네 그럼에도 주변과 어울리는 타테마에가 있는 듯. 그리하여 어찌 저들과 닮았기에 고양이는 한층 터부시됐다.
비교적 최근에는 서양 발 고양이가 또 하나의 빌미를 주고 있다. 다름 아닌 살찐 고양이다. 살이 쪘기에 몸집은 비대하고 무척 느리다. 하지만 눈앞에 먹이가 있다면 그 동작은 모두에 앞서 민첩하다. 배가 부름에도 결코 양보하거나 포기하는 법이 없다. 이에 주변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탐욕만을 채우는 일부 기득권 계층이, 살찐 고양이로 비유되고 있다.
또 그들의 탐욕은 스스로 제한되지 않는 무절제를 특성으로 하기에 법률로서 제한해야 한다고 살찐 고양이 법이 논의되기도 한다.
하지만 고양이에게 결코 잘못은 없다. 가만히 있는 생명의 눈을, 처연한 울음을 괜히 싫어했다.
이제까지도 고양이에게 나름 야만을 자행해 왔는데, 이제 또 다른 오명으로 덧칠할 기세이다. 분명 고양이는 느림과 민첩의 도도한 미학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도, 이를 부자의 천박한 탐욕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에 대한 오랜 편견을 쉬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의 살찐 고양이 오명은 벗게 해주고 싶다. 그 오명을 벗기 위해서 고양이로 비유되는 그 사람들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법으로 강제되기 이전이라도 천박한 탐욕을 조금이라도 버려야 한다. 적당한 욕심이 계속되기 위해 모두의 안전이 선행돼야 함을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주변을 둘러보고 배려하는 노력이 반드시 앞서야 한다. 바보야! 문제는 고양이가 아니야, 바로 사람이야.
이계존 수원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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