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경기, 그 역사문화

“왕도(王都)와 왕실을 보위하기 위한 왕도의 외곽지역 또는 주변지역”. 경기(京畿)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이다. ‘외곽’과 ‘주변’은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상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도권(首都圈)’이란 현재적인 용어와 다르지 않다.

이같이 단어에서 풍기는 2% 부족한듯한 뉘앙스는 여러 분야에서 경기의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해왔다. 과연 ‘경기’는 중심(왕도)에서 벗어난 가장자리의 위치일까. 전통시대부터 현재까지 경기의 범위와 개념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나 지리적으로 변화 없이 지속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이제까지 우리의 관심은 깊지 못했다.

고려와 조선에서 경기(京畿, 畿甸, 畿輔)는 ‘근본의 땅(根本之地)’, ‘사방의 근본(四方之本)’, ‘사방근본의 땅(四方根本之地)’, ‘국가근본의 땅(國家根本之地)’로 규정됐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서 수차례 확인되는데 경기가 국가를 지지하는 뿌리, 기본이라는 뜻이다. 외곽 또는 주변 지역과는 아주 거리가 있다.

고려의 경기는 해동천자였던 고려황제가 다스리던 해동천하의 중심이었고, 조선의 경기는 덕치(德治)가 우선 이뤄져야 하는 뿌리이자 샘이었다. 이를 통해 유교적인 왕도정치(王道政治)가 구현됐다.

경기는 고려와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에서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곳으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땅이었다. 국내외에서 다양한 문화와 문물은 경기에 모여 다양성, 개방성, 포용성, 역동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문화와 문물로 재창조됐고, 국내외로 재생산돼 나갔다.

경기역사문화는 서울(京師)에 종속된 주변문화여서 정체성이 없거나 특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다양하고 개방적이어서 우리가 그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경기인(京畿人)이라는 나부터 자성해야 할 일이다.

19세기 말 이후 우리는 백여 년을 외세가 주도한 왜곡된 근대화와 산업화를 경험해야 했다. 그간 경기에 대한 개념과 영역에도 변화가 있었다. 도성(都城)부터 10리까지를 관할했던 한성부(서울)의 영역이 경기까지 확대됐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서울로 급속하게 재편되면서 경기와 그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그것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경기와 그 역사문화의 본질을 재탐구해야 할 때다. 개편된 경기도박물관의 상설전시는 그 시작이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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