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8월의 더위가 우리의 몸을 감는다. 울창한 한여름의 숲 속 길을 따라 두 갈래 길이 보인다. 내일의 길은 푸른 빛의 소나무가 울창했다. 검정 고무신을 신은 소년의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소년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한낮의 햇살이 더없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무신발을 신은 어린이가 숲길을 헤매고 있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아동은 절망의 숲길을 정처 없이 돌고 있었다. 검게 타다 남은 잔목들 사이로 검은 상처를 품은 야생화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소년의 영혼을 혼미하게 어지럽히고 있었다.
어제의 승자가 그날의 패자였다. 그해 8월 초 두 번의 섬광을 보기 전에 도쿄의 지도부는 게임을 끝낼 수 있었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그해 3월 도쿄대공습은 전주곡이 아니었다. 연이은 나고야, 오사카, 고베 공습 역시 서곡이 아니었다. 화염과 굉음이 지축을 흔들었고 포효하던 제국주의의 교향곡 연주는 숨이 차고 있었다.
5개월 후 히로시마의 선량한 시민들은 하소연할 촌음도 찾지 못했고, 나가사키의 소시민들은 몸을 피할 한 평 공간조차 찾을 수 없었다. 군국주의 연주가 멈추고 점령군이 일본 전역을 장악했다.
일부 인사들의 의욕이 넘친다고 평화헌법이 쉽게 개정되지는 않는다. 대다수의 일본인은 여전히 악몽을 꾼다. 해마다 3월10일이 되면 검붉은 섬광 아래 소이탄의 파편들이 나뒹굴던 1945년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가미가제의 대가가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대대로 이어질 영광이 아니고 그저 한편의 악몽이었다.
도쿄대공습의 검은 사진들을 다시 보아야 평화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히로시마의 박물관을 둘러보아야 국제 평화주의의 진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연로한 모습으로 연명하고 있는 앞서간 세대의 희미한 기억만 잠시 살펴도 일본은 제대로 판단할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경계하고 있다. 역사의 반전을 두려워하고 있다. 일본 땅에서 일어나는 혐한시위는 역사의 반전을 예고하는 일이다. 한 수 아래로 간주되는 나라를 겨냥한 시위는 없는 것이다.
가속도가 붙어 질주하는 나라는 무섭다. 한국을 잘 아는 일본인일수록 역전 가능성을 우려한다. 국제무대에서 영원한 강자도 없다. 패배주의를 딛고 힘차게 일어서는 민족이 새로운 강자이다. 혁신주의의 기치를 드높이고 신기술을 선도하는 나라가 진정한 21세기의 강국이다. 검정 고무신을 신은 그때의 당찬 소년이 이제 은발을 흩날리며 화사하게 다가올 내일의 추억을 상상한다.
최승현 전 경기도 국제관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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