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어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그 사람과 동행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가장 적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행복은 끝없는 욕망을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는 데 있다. 욕망을 다스린다는 것은 ‘움켜쥘 때와 펴야 할 때’를 아는 것이다.
북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원숭이를 잡을 때 조롱박을 준비한다고 한다. 조롱박에는 원숭이의 손이 간신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땅콩, 밤, 과일 등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것을 원숭이가 지나는 길목의 나무 밑 둥에 묶어 둔다. 냄새를 맡고 온 원숭이는 조롱박 구멍 속에 손을 넣고 먹이를 한 움큼 움켜쥔다. 하지만 잔뜩 움켜쥔 손은 구멍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다. 먹이를 포기하고 손을 펴기만 하면 되는데, 원숭이는 어리석게도 사람이 다가와도 꽉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아 결국 잡힌다고 한다. 움켜쥘 줄만 알고 펼 줄을 몰라 욕망의 희생양이 되는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욕망은 양면성이 있으며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재물이나 사회적 지위를 끝없이 ‘더 채우려는 욕망’이 있는 반면 창조적 활동을 통해 무엇인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생산적 욕망’도 있다. 사람은 무의식 상황에서 더 채우려는 욕망과 생산적 욕망을 함께 지니고 있다. 남다른 재능이 있어도 미래를 향한 생산적 욕망이 있어야 능력을 발휘해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며, 그런 욕망이 없으면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사장시키기도 한다.
욕망이 정의와 만나면 삶의 가치를 높이지만, 불의와 만나면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파멸시킨다. 욕망이 선과 결합하면 희망이 싹트지만, 악과 야합하면 절망에 빠진다. 선과 악,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서 욕망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도 바뀐다.
문제는 욕망을 마음대로 조절하고 다스리는 것이 태산을 옮기기만큼이나 어렵다는데 있다. 꾸준히 계속해서 추구해야 좋은 ‘생산적 욕망’은 중도에 포기하려 들고, 멈추는 것이 현명한 ‘더 채우려는 욕망’은 어느 선에서 그치지 못하고 탐욕의 수렁에 빠지고 마는 경우가 흔하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맹수들도 자기 배가 부르면 먹잇감이 지나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이다.
엄밀히 생각하면 평균적 생활수준을 뛰어넘은 후에 소유하는 재물의 많고 적음은 행복감에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일류 레스토랑에서 명품 와인을 곁들여 고급요리를 먹으며 상대방과 사업이야기를 주고받는 것과 전통시장에서 막걸리를 곁들여 순댓국을 먹으며 마음 맞는 친구와 담소를 나누는 것은 음식값의 차이는 크겠지만, 행복감도 큰 차이가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행복은 음식값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달렸기 때문이다.
‘춘하추동’이 자연의 섭리라면 ‘생로병사’는 인간의 섭리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지구 상에 던져졌고,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다. 머무름의 시간은 한계가 있으며, 결국은 빈손으로 왔다가 시간이 흘러 때가 되면 빈손으로 간다.
그런데 잠시 머무는 인생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는 데서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불행이 싹튼다. 욕심의 반대는 욕심 없음이 아니라 잠시 내게 머물고 있는 것들에 대한 만족이다. 자기 자신이 지구 상에 잠시 머물고 있는 것이기에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삶은 지금이고, 현재이고, 오늘이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추억일 뿐이고, 미래에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꿈이고 희망이다.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고 연속되는 ‘희로애락’의 여러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움켜쥘 때와 펴야 할 때를 아는 판단력과 행동에 옮기는 실행력을 갖춰야 한다.
정종민 성균관대 겸임교수ㆍ전 여주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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