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김포장릉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중 하나인 ‘김포장릉’이 매스컴에서 계속 오르내린다. 인천 검단신도시 일대 아파트 건축공사의 문화재 보전구역 내 행위제한 규정 이행 여부 때문이다.

그런데 왜 각 매체에서는 김포의 ‘장릉’을 ‘광릉’ ‘태릉’ 처럼 능호(陵號)만을 칭하지 않고, 앞에 지역명칭을 붙여 ‘김포장릉’이라 하는가.

조선왕릉 42개(남한40,북한2)중 능호가 ‘장릉’인 곳은 3곳이다. 한자로는 다르지만, 발음상 똑같다. 모두 범상치 않은 사연을 간직한 능이다.

영월의 장릉(莊陵)은 단종(端宗)의 능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돼 영월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시신은 동강 가에 버려졌다. 시신을 거두지 못하게 했지만 ‘엄흥도’가 몰래 수습해 영월 북쪽 산속에 장사를 지낸다. 그 후 180년이 지난 숙종 때(1698년)에 ‘노산군’은 단종으로 추상(追上)되고, 암매장됐던 묘가 장릉(莊陵)이 되었다. 단종의 죽음에 <세조실록>에서는 ‘스스로 목매 죽으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라고 하고,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를 간악하고 아첨하는 자들의 붓 장난 이라며 실록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묘사했다.

김포의 장릉(章陵)은 추존왕(追尊王) 원종(元宗)과 인헌왕후의 능이다. 원종은 인조(仁祖)의 친부다. 생전에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으나 자식이 왕이 되면서 추대로 왕이 된 사람을 추존왕이라 한다. 조선조에서 추존왕은 모두 5명이다. 이 중 4명은 세자의 위치에서 죽었고 그 자식이 왕이 되면서 추존됐다. 하지만 원종은 예외다. 원종은 인조가 등극하면서 아버지를 추존하려 했지만, 세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신하들 반대가 강해 추진하지 못하다가 10년이 지난 후 반대를 무릅쓰고 추존된 왕이다. 김포장릉은 원래 인조의 어머니 묘다. 아버지 묘는 양주에 있었는데 이장하여 곁에 함께 묻힌지 5년 만인 인조10년(1632년)에 추존되면서 이 묘가 장릉(章陵)이 됐다.

파주의 장릉(長陵)은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이다. 장릉은 처음에 파주 북쪽에 조성됐다. 숙종 때 장릉이 풍수적으로 좋지 않다는 소문과 함께 옮겨야 한다는 상소가 줄을 이었지만, 숙종이 상소자들을 엄한 죄로 다스리므로 잠잠해졌다. 영조 때에 와서 세자가 요절하는 변고가 생기면서 이것은 장릉의 풍수적 결함 때문이라는 주장이 다시 부상하면서 조성 82년 만인 영조7년(1731년)에 지금의 곳으로 옮겨졌다.

이렇듯 장릉이 3곳이므로 능호 앞에 지역의 명칭을 붙여 칭하고 있다.

이번 ‘김포장릉’ 근접지역의 아파트 건축사례가 법 목적과 현실의 상황에서 최상의 해법이 마련되고, 문화유산보호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황용선 전 파주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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