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대유행을 겪으면서 우리가 뼈저리게 각성하고 있는 것이 있다. 위기로 인한 위험이 사회를 압박해오면 결국 먹고사는 문제로 환원된다는 것, 생존의 문제라는 것, 다만 어떻게 경중시급을 다퉈서 정의롭게 희생과 낙오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위기를 슬기롭게 관리하고 극복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정의’를 다투는 문제는 다시 정치의 문제로 전환된다. 정치의 수준이 위기 극복을 위한 ‘정의로운 과정과 방법’을 논의하고 합의하고 이행하는 사회의 역량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어떤 정치를 만들어왔는가 자문해봐야 한다.
역사적 경험에서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차선이라는 미명 아래 희생과 낙오는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기후위기에서 희생과 낙오는 인류문명 자체의 문제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화석연료와 자원을 무한정 채취하고 태우고 소모하면서 기존과 똑같이 ‘경제성장’ 운운하는 방식으로는 한 세기도 못 가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종말의 특이점을 넘고 말 것이라는 게 인류문명이 축적해온 모든 과학적 업적을 동원한 연구의 결과다. 그리고 이 증거들은 IPCC 회원국 모든 정부가 동의하지 않으면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도 없는 보수적인 추정치들이다. 사실은 현실은 더 급박하다.
그러니 석탄발전소를 새로 건설하고 이 짧은 나라에서 여기저기 지역공항이나 짓겠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도심을 확장하겠다고 우량농지를 마구 짓밟는 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기후위기는 식량위기의 다른 말이고 우량농지는 가장 중요한 도시의 인프라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언론은 어떤 사회의제를 만들고 있는지 돌아보자. 대통령선거와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정당과 정치인들이 쏟아 내는 비전과 공약들은 실제로 실현될까 두려울 만큼 기존의 경제성장 패러다임과 닮아있다.
기후위기로 인한 위험은 그 위험을 대하는 사회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할 것이다. 실패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이면서 존재의 문제,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 역사적 경험을 교훈으로 삼되 경로만을 좇아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 경험들이 낳은 현재이기 때문이다. 위험을 직면하게 될 이해당사자들이 직접 민주적 공론장을 만들어가는 시민행동이 필요하다. 책임에 따라 마땅하게 짐을 나눠서 지는 지역의 위기대응 시나리오도 필요하다. 이 문제만큼은 목표와 가능성을 한정하지 말고 높여가야 한다. 그게 기후위기대응의 지름길이다.
윤은상 수원시민햇빛발전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