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몽니와 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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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자 시조시인

몽니와 추앙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다만 묻혀 있던 단어를 누군가 되살려 쓴 뒤 활용되는 점이 닮았다. 몽니는 어느 정치인이 쓰며 존재감을 만천하에 새로 드러낸 고유어다. 추앙은 최근 TV드라마 작가가 새롭게 살려 쓴 덕에 대중의 관심을 받는 한자어다. 평소 잘 쓰지 않던 말들의 먼지를 털어낸 언어 촉에 따라 일상으로 확실하게 등판한 것이다.

몽니보다야 추앙이 당연히 좋다. 견줄 표현도 아니지만, ‘음흉하고 심술궂게 욕심 부리는 성질’이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의 급을 따르겠는가. 아무튼 요즘 떠오른 추앙만 봐도 책 속에만 잠자다 불려나와 재활용되는 말로 레트로 같은 유행을 타고 있다. 청춘의 고단한 현실에 겹치는 의미까지 덧대며 젊은이들이 즐겨 쓰니 외연의 확장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판을 돌아보니 언어를 오늘의 사용법에 어떻게 더 어울리게 쓸지, 날마다 쓰는 언어의 면면이 새삼 크게 닿는다.

몽니는 현실에서 안 만나고 싶은 말이다. 추앙은 현실과 좀 동떨어진 말이다. 그런 몽니와 추앙이 실은 현실에도 자주 출몰한다. 정치의 계절이면 몽니며 추앙의 어금니가 더 드러났으니 귀 씻고 눈 씻고 외면할 수 있다. 그런 정치판의 말판을 떠나 우리 일상을 봐도 닥치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비일비재한 몽니를 치우고 추앙을 다시 보면 새삼 깨우는 게 많다. 말이란 많이 쓸수록 본뜻보다 풍부해지게 마련이지만, 요즘 만나는 추앙은 일종의 즐거운 발견이다.

혹 “날 추앙해요”라는 말을 들으면 어떨까. 당혹감이 크겠지만 그냥 뜬금없다고 헛웃음을 흘리고 말까. 아무튼 위인이나 부모(드물지만 부모를 존경한다는 사람도 있다) 추앙에는 끄덕이지만, 주변의 장삼이사(張三李四) 추앙은 거의 없으니 갸우뚱하겠다. 그런데 재고할 것은 그 말을 건넨 상대의 상태다. 이런저런 피해로 바닥에 떨어진 자존감을 찾고자 던진 말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터진 청이라면 추앙의 마음을 보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마음을 받아 다시 살아갈 힘이 솟는다면.

그렇게 보면 추앙은 어떤 대상에 바치는 순정한 마음이다. 예컨대 시나 그림이나 음악 같은 예술에 바치는 추앙도 있다. 그보다 이해와 배려를 담은 존중의 자세라면 일상 속의 다양한 추앙도 가능하겠다. 아부와는 다른 진정한 마음의 높임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일상에는 높임말이 지나치게 넘치는데 높임의 마음은 인색하고 적은 느낌이다. 그런 판에서 몽니를 줄이고 추앙을 늘린다면 기울어진 마음의 평형도 잡고 세상 골목까지 환해질 듯하다.

커튼을 열며 오늘의 추앙을 찾아본다. 오늘의 커피를 음미하는 소소한 즐거움처럼. 추앙이 사랑의 다른 형태로 곁에 선다. 오늘의 길에서도 새삼 추앙하고 싶은 풀꽃들을 만나려니.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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