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설전시실 들어서면 ‘연꽃의 역사’ 한눈에...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다양한 유물과 만남 기획전시실, 민화 속 연꽃 만날 수 있는 기회, ‘과거를 열연하다’ 주제 인문학 프로그램도 현재 ‘연꽃 문화제’ 한창...나들이객 유혹
형형색색 연꽃의 바다… 향기에 취하다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 마음을 씻고[洗] 마음을 아름답게[美] 가꾸는 것은 ‘물과 꽃의 정원’ 양평 세미원의 개관 철학이자 설립 목적이다. 출입문에 새겨진 ‘관수세심(觀水洗心) 관화미심(觀花美心)’이란 여덟 글자에 담긴 그윽한 뜻을 음미하며 세미원에 들어선다. 세미원 입구에 자리 잡은 연꽃박물관(대표 이종승)은 연꽃의 곧은 줄기와 둥근 잎을 닮은 듯하다.
■ 연꽃에 영혼과 일상을 새기다
찻집을 겸한 세미원 작은도서관에서 차를 마시고 이가영 홍보담당의 안내를 받아 박물관을 둘러본다. “2층은 상설전시실, 3층은 기획전시실로 운영됩니다. 규모가 크지 않아 조금 아쉽지만, 연꽃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들을 한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담하게 조성된 상설전시실에서 우리나라 연꽃의 역사부터 살펴본다. 강화도 백련사(白連寺)는 고구려 장수왕 4년(416)에 세운 고찰로 연꽃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삼국시대에 인도 승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절터를 찾다가 강화도 고려산 정상에서 다섯 색깔의 연꽃이 만발한 연지(蓮池)를 발견했는데, 흰 연꽃이 흩날려 떨어진 곳에 백련사를 세웠다는 전설이다.
신라의 기와에 연꽃이 피어있다. 고구려와 백제도 연꽃문양의 와당을 즐겨 사용했다. 연꽃무늬를 양각으로 새겨진 ‘수막새’는 1천500년이 된 유물이다. 거칠고 날카로운 고구려와 달리 백제의 연꽃 문양은 부드럽고 둥글다. 화려하고 정제된 통일신라시대의 기와에서 신라인의 개방적인 문화의 저력이 느껴진다.
실패에 하얀 무명실이 감겨 있다. 음각으로 단아하게 새겨진 복(福)이란 글자와 연꽃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듯하다. 푸른 연잎과 분홍빛 탐스러운 연꽃, 갈색 연밥 줄기 아래로 원앙새 한 쌍이 헤엄을 치고 있다. “연꽃을 화려하게 수놓은 분홍빛 주머니는 휴대용 수저주머니입니다. 아주 오래된 유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1940년대의 유물이지요” 연세가 지긋한 관람객들이나 알 수 있을 것 같은 희귀한 유물도 있다. ‘연지문인두판’은 연꽃을 수놓은 인두판이다. ‘인두’는 옷의 솔기 같은 부분을 접거나 선을 내기 위해 사용하는 다림질 도구이다. 타원형의 둥글납작한 물건은 무엇일까. “아, 이것은 연꽃 문양을 수놓은 안경집입니다. 예전에도 안경을 사용했는데, 사용하지 않을 때는 이 안경집에 담아 허리춤에 매달았다고 해요” 부잣집 아이들이 겨울에 머리에 썼던 장식 모자인 굴레도 만나기 힘든 흥미로운 유물이다. 굴레 좌우에 다섯 송이 연꽃이 피었다. 숟가락 손잡이의 장식이 연꽃봉우리다. 선비들의 붓통과 먹을 담은 연적조차 연꽃 모양이다.
‘연꽃소반’은 놀라운 유물이다. 거북이 받침에 연꽃의 대궁과 줄기로 이루어진 다리, 그릇을 올려놓는 판은 활짝 핀 연꽃을 자개로 장식했다. 이처럼 연꽃을 소재로 멋지게 만든 소반은 달리 찾기 어려울 것이다. 연잎과 연꽃이 절묘하게 표현된 비취빛의 청자베개에서 고려인의 호방하고 우아한 정취가 묻어난다. 연꽃이 그려진 ‘청자발’에도 고려인의 세련된 감각이 살아있다. 시를 즐기던 옛 선비들이 귀한 사람에게 시를 지어 전달할 때 쓰기위해 따로 종이를 만들었다. 이를 ‘시전지(詩箋紙)’라 부르는데, 연꽃박물관에서 만난 열네 줄의 ‘시전지판’에도 연꽃이 활짝 피어있다. 아마도 이 시전지판의 주인은 ‘수륙초목지화’로 시작되는 주염계(1017~1073)의 ‘애련설’을 읊조리며 품격 높은 생활을 추구했을 것이다. 연꽃 한 송이를 안고 연화대에 앉아 있는 승려의 무릎 위에는 푸른 연잎이 놓여 있다. 연꽃봉우리를 가슴에 품고 있는 민불(民佛)도 만난다. 보살의 선한 눈매가 평화롭다.
■ 민화, 그림에 담은 옛사람들의 꿈과 소망
3층 기획전시실에서 민화 속의 연꽃을 만난다. 서민들의 소망과 미학이 담긴 정겨운 민화 속에도 연꽃들이 만개했다. 민화에 등장하는 연꽃들은 한결 여유롭다. 연밥에 앉아 씨를 빼 먹는 물총새 한 쌍과 커다란 연잎 아래서 짝짓기를 하는 노랑부리백로 한 쌍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연밥을 좋아하는 물총새는 물론 해오라기와 오리, 잉어와 가물치도 늘 쌍으로 등장한다. 연꽃과 어울리는 새와 물고기들의 평화롭고 느긋하며 우스꽝스러운 몸짓은 한가하고 여유롭다. 웃음과 여유와 휴식은 민화가 우리들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매력이다.
2009년 1월에 개관한 세미원 연꽃박물관은 관람객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에도 열심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박물관협회가 주관하는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 공모 사업에 3년 연속 선정된 박물관은 지난 3월부터 ‘과거를 열연(熱演)하다’를 주제로 인문학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과거를 열연하다는 연꽃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선비들이 쓰던 문방사우와 규수가 사용하던 공예품을 관람하고, 세미원 정원에 복원된 과학영농온실, 사륜정, 세한정 등 조상의 정신이 느껴지는 유물과 시설을 통해 역사와 문학과 예술을 익히는 프로그램이다. 11월까지 운영되는 이 프로그램의 대상은 초·중·고등학생으로 총 40회 25명 내외인데, 세미원 관람료만 내면 이용할 수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통해 각종 교육기관과 연대를 강화하고 프로그램 참여자에게는 조상의 뛰어난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향원익청,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평군 양서면 두물머리에 위치한 세미원에서 지난 7월 1일부터 ‘연꽃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세미원에 들어서면 눈부신 백련과 매혹적인 분홍색의 홍련이 뿜는 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잔잔한 물과 어울리는 수련과 노랑어리연꽃,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된 희귀종 가시연꽃, 사람이 탈 수 있을 정도의 큰 잎을 가진 빅토리아 수련, 세미원이 최근 개발해 품종 등록한 수련 ‘세미 1호’와 오묘한 빛깔로 사람을 유혹하는 수련 ‘완비사’도 감상할 수 있다. “세미원을 방문하면 진흙에 물들지 않고, 물방울이 구슬처럼 영롱하게 잎에 맺히고, 향기는 멀리 퍼지는 연꽃을 보며 여유를 되찾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연꽃은 여름 꽃이다. 더위를 좋아해서 더울수록 햇빛을 양분 삼아 더욱 잘 피어난다. 연꽃은 7월에 만개하여 8월이 되면 꽃과 잎이 지고 연밥만 남게 된다. 연꽃을 감상하기에는 한낮보다 시원한 강바람이 부는 저물녘이 더욱 좋다. 연꽃은 아침에 활짝 피었다가 정오 무렵부터 꽃봉오리가 서서히 닫힌다. 활짝 핀 연꽃을 구경하고 싶다면 이른 아침에 찾아야 한다.
조선홍련이 피는 ‘홍련지’, 연못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놓인 ‘백련지’, 세계적인 연꽃 연구가 페리 슬로컴이 개발·기증한 연꽃이 피는 ‘페리 기념연못’, 빛의 화가 모네의 그림 ‘수련이 가득한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조성한 ‘사랑의 연못’에서 연꽃을 만끽할 수 있다. ‘물의 요정’이라 불리는 수련도 세미원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세미원 보유식물은 약 270여종인데, 70여종의 수생식물과 120여종의 초본식물, 80여종의 목본식물이 있다.
세미원은 팔당호 변의 수몰 지역의 하천부지를 개조해 2004년 연면적 20만여㎡ 규모로 맑은 한강을 만들기 위해 수질 정화 능력이 뛰어난 연꽃을 심어 조성한 연꽃·수생식물 정원이다. 설립 당시 경기도에서 103억 원을 지원하여 수질과 토양 정화 능력이 탁월한 연꽃을 심어 상수원 수질을 정화하고 생태교육과 주민 휴식공간으로 조성하였다. 2019년 6월에는 경기도 지방정원 제1호로 등록됐다.
세미원을 장애물 없는 ‘열린관광지’로 조성했다. 한국관광공사가 주도하는 열린관광지는 장애인, 어르신, 영·유아 동반 가족을 포함한 모든 관광객이 불편 없이 여행할 수 있는 무장애 관광지를 말한다.
사계가 아름답지만 초가을에 열리는 ‘수련문화제’는 연꽃문화제와는 또 다른 매력을 안기는 축제이다. 겨울이면 백조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큰고니가 찾는다. 지난 해 겨울에는 고니 269마리가 휴식하여 세미원은 ‘백조의 호수’ 변신했다. 세미원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편안하고 넉넉한 정원이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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