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량자고(懸梁刺股)’라는 말이 있다. 자는 시간도 아까워 끈으로 머리를 묶어 들보에 매달았다는 현량의 고사와 잠이 오면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러가며 공부했다는 소진의 고사가 결합된 말이다. 공부에 빠져 공부를 위한 삶을 살았던 사례는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수많은 학생들을 잠 못들게 하며 영향을 주고 있다.
빠르면 초등학교 입학하는 순간부터 옆 눈 가린 경주마처럼 입시의 긴 터널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대학 가면 해결될 줄 알았던 공부 열풍은 스펙 쌓기로 지속되고, 취업 후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으로 계속된다. 수단으로 전락된 공부 때문인지, 최근 배움의 전당이 흔들리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에서 도쿄대가 찻잔과 같은 전문적 바보를 양산해왔다고 진단한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것일까. ‘공부(工夫)’의 ‘공(工)’은 땅을 다질 때 쓰던 돌 절굿공이를 형상하고 있다. 절굿공이로 땅을 다지듯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를 의미하는 ‘학습’도 논어 첫 문장에서 기인한다. ‘배우고 부단히 익혀라[學而時習]’. ‘배움[學]’은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부단히 힘쓰는 ‘익힘[習]’의 과정이 수반돼야 한다. 자율적인 의지를 발현해 선현들의 지혜를 학습하는 것이 우선돼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공자는 배움의 목적이 ‘자기를 위한 것[爲己之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남의 시선이나 외부 기준에 부합하는 공부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공부는 자기다움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
퇴계는 깊은 산 무성한 숲에 홀로 피어난 난초가 남에게 향기를 자랑하기 위해 꽃 피우지 않듯이, ‘천성(天性)’ 그대로 꽃을 피우고 향내를 풍기는 자기 함양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미꽃은 장미꽃대로, 안개꽃은 안개꽃대로 묵묵히 자기 모습을 꽃피워야 아름답다.
스티브 잡스는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나다움’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통념에 나를 맞추느라 시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울려오는 직관에 귀 기울이고,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는 공부의 결과가 기쁨(不亦說乎)이라고 강조한다. 배움의 과정이 고통스럽다면, 지금 하는 공부가 남을 위한 공부인지 나를 위한 공부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다움을 찾아가는 공부는 결과의 좋고 나쁨과 무관하게 그 자체가 기쁨을 줄 수 있다. 나를 위한 공부는 그것이 무엇이든 자체가 목적이고 과정도 의미 있다. 즐거움은 덤이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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