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일체유심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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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진세 칼럼니스트·에세이스트

지난해 봄 어느 날 천변을 걷고 있었다. 발밑에 연두색 애벌레가 길을 가로질러 바삐 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새의 먹이가 되거나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지쳐 쓰러질 게 틀림없을 것 같았다. 발길을 재촉하며 가던 길을 걷고 있는데 애처로운 애벌레가 뇌리에서 맴돈다. 발길을 돌려 녀석을 길 건너 풀숲에다 놓아줬다. 신이 난 듯 풀숲으로 들어간다.

 

허리를 숙여 바라본 풀숲에는 각종 곤충의 애벌레가 천국을 이뤄 살아가고 있었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모습이다. 풀숲에는 그들만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낮은 천변에서는 어른 팔뚝만 한 잉어 수백마리가 펄떡거린다. 암컷이 방금 산란한 알 위에 수컷이 수정하고 있었다. 생명 잉태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자연의 풍경이 경이롭다.

 

대여섯 마리의 집오리 틈에 외로운 왜가리 한 마리가 애처로이 놀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고향으로 떠나지 못하고 텃새가 된 것일까? 예전보다 맑아진 천변에서 정겨운 동물 가족과 눌러살기로 작정한 것일까? 새들은 사람을 겁내지 않는다. 먹이를 받아먹고 친근감을 보이며 어울려 살아간다. 비둘기며 참새 등은 사람이 지나가도 슬쩍 비켜줄 뿐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가의 커다란 잉어들도 사람의 그림자를 보면 따라다니는 것이 강아지를 닮았다.

 

자연과 함께, 동물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마도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매년 수없이 천변을 오갔지만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모습이다. 하지만 이번 봄에는 아름답게 보인다. 그전에는 이런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겨울이 너무 혹독하게 추웠기 때문에 봄이 온다는 희망을 잃고 살아서일까?

 

사람들은 사물을 볼 때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선별해 나름대로 각색하고 왜곡해 보고는 내가 본 것이 옳다고 우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왜 사람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일까. 같은 풍경도 자신의 근기(根氣)대로 보고 느끼기 때문에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

 

불가에서는 실상(實相)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가르친다. 즉, 세상을 나의 주관으로 보지 말고, ‘자연의 본래 모습’을 느끼라고 한다. 그래야만 사물의 본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경이로운 생명력으로 꿈틀대는 지상낙원이었다. 그러나 나의 주관으로 보는 자연의 모습은 모두 왜곡된 모습이란 사실을 알았다. 나의 업식(業識)이 자연의 본래 모습을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본 자연은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었다. 그동안 내 생각대로 멋대로 세상을 바라보고서는 세상 탓을 하며 살아왔다. 검은색 안경을 쓰고서는 세상이 어둡다고 불평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즉, 나의 주관대로 세상을 바라보고는 내 생각이 모두 맞는다고 고집하는 우(愚)를 범(犯)하며 살아왔다.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라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부정적인 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는 온 세상이 긍정적으로 보일 리 없다.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세상을 직시할 수 있다면 세상살이가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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