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용만과 하와이 노동이민자들의 독립정신

한정규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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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동북아를 둘러싼 중국 등 주변국의 행태를 보면서 20세기 초 한민족이 겪었던 갖가지 일 중 하와이 노동 이민자와 박용만의 독립운동을 뒤돌아보게 됐다.

 

먹고사는 게 힘들어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갔던 동포들은 고국의 독립을 위해 하와이에 무장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박용만을 필두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치했다. 박용만은 1881년 강원 철원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곧고 성실한 가운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올곧은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의 만행에 주저하지 않았다. 1904년 일본이 조선에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박용만은 항일단체 보안회가 주도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잡혀 한성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옥중에서 이승만을 알게 됐으며 출소 후 각각 미국으로 갔다. 1909년 네브래스카 커리농장에서 일하면서 무장 독립군 양성을 위해 한인소년병학교를 설치하고 항일운동의 요체로 군대 양성을 통한 개병주의를 실행했다. 이후 대조선 국민군단을 설립·지도하는 등 무장투쟁운동을 펼쳤다.

 

그는 미국에서 조선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스스로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가정부(假政府·Shadow Government)를 선포해 해외 조선인의 최고기관으로 했다. 대한인국민회에 사법부와 입법부를 두고 입법부에는 참의원과 대의원을 뒀다. 의원들은 총회에서 선출했다. 입법부가 대한인국민회 법률을 제정한 그 중심에 박용만이 있었다.

 

재정은 개납제로 성금을 내도록 했다. 또 그는 해외 자치정부인 가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적 대의제도와 자치제도, 경찰권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최소한의 사법제도를 도입해 하나의 작은 정부를 구상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박용만의 가정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반기를 들었다. 이승만은 ‘조선인이 미국에 사는 이상 미국에 충성을 해야 한다. 미국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여기며 박용만이 주장하는 가정부 또는 무형정부 같은 자치제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사찰하는 외교문서, 또는 조선 내외 모든 언론에서 상하이임시정부만을 가정부로 인정했을 뿐 박용만의 가정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하와이 노동이민자들이 펼친 조선독립운동은 독립운동 유공자들 못지않게 훌륭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겨울이 지나면 선거의 계절이다. 정치인들은 박용만의 애국정신을 되새기고 배워야 한다. 무엇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것인지를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들 역시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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