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경허,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복진세 칼럼니스트∙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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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鏡虛) 스님이 시종을 데리고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마침 장맛비로 개울물이 불어 개천을 건너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때 울고 있던 젊은 여인이 스님에게 자신을 업고 개천을 건너줄 것을 청했다. 스님은 망설임 없이 젊은 여인을 업어 개천 건너편에 내려놓고 무심히 앞서 걷고 있었다.

 

시종은 스님이 젊은 여인을 업고 개천을 건넌 점이 영 못마땅했다. 출가자는 여색(女色)을 멀리하라는 계율(戒律)을 잊었단 말인가. 아무리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하며 무애행(無碍行)을 즐기는 스님이지만 오늘 일은 이해할 수 없다. 시종은 때를 기다려 오늘 일을 따져 물을 참이었다.

 

시종은 망설이다가 “스님께 여쭤볼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 보아라.”, “개울물을 건널 때 젊은 여인의 청을 거절하는 것이 출가자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스님은 어찌하여 망설임 없이 업고 건너 주었는지요?”

 

경허 스님은 웃으면서 “어허, 이놈 봐라. 나는 개울을 건넌 직후 바로 그 여인을 내려줬는데, 너는 어찌하여 그 여인을 아직도 업고 다니느냐?”

 

경허 스님은 계율을 스스로 파계(破戒)하고 ‘보살도(菩薩道)’를 실천하신 분이다. 계율을 지키기 위해 보살도를 행하지 못한다면 그건 큰 모순(矛盾)이다. 계율을 지키며 수행을 한다는 것은 보살도를 행하며 자아(自我)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보살도를 실천할 때는 ‘수단이 목적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경허 스님은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라(우무비공처·牛無鼻孔處)”는 말을 듣고 “콧구멍에 코뚜레가 꿰여 고삐를 당기는 대로 끌려다니는 삶을 살지 말라”고 한 뜻을 단번에 깨쳤다고 한다. 계율에 얽매여 보살도를 행하지 못한다면 ‘코뚜레에 코가 꿰인 소’하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스님은 막행막식을 하며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무애행’을 즐겼다. 경허 스님은 계율에 얽매여 보살도를 행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수행자가 아니었다. 스스로 파계해 자신을 낮춰 불교의 숭고한 정신인 보살도를 실천하신 분이다.

 

이타심(利他心) 없는 무애행은 ‘막행막식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보살도가 우선 된 무애행’은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다. 이처럼 자유란 방종의 단순한 반대말이 아님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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