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이자 마지막인 서커스단, 흥망성쇠 반복하며 안산 명물 안착 지금은 전국서 관광객 발길 이어져... 박세환 단장 “동춘 명맥 이을 것”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현재 대한민국에 마지막 남은 서커스 공연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장내에 안내방송이 흘러나오며 천막극장의 막이 올랐다. 자칭 ‘예술회관급’ 의자에 앉은 관객들의 몸이 무대를 향해 앞으로 쏠렸다. 청년 일곱 명이 기다란 봉 하나에 매달려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인 터였다. 한 손으로 봉을 잡고 옆으로 뉘인 몸을 곡예사들은 마치 땅을 걷듯 공중을 걸었다. 몸의 근육을 세밀하게 쓰는 섬세한 움직임과 고도의 집중력. 100년의 역사와 자존심을 건 한편의 공연이 또다시 시작됐다. 편집자주
지난 9일 오전 11시 안산 대부도의 동춘서커스단 상설공연장엔 강한 바람을 뚫고 주말 첫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의 줄이 꼬리를 물었다. 곳곳에 붙여진 ‘대한민국 최초의, 최후의 서커스단’ 문구는 공연단의 자부심을 한껏 드러냈다.
동춘서커스는 1925년 동춘 박동수씨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커스단이자 마지막으로 남은 서커스단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예술단체이기도 하다.
100년의 역사만큼 사연도 숱하게 많다. 민족문화가 말살됐던 일제강점기에 전국 순회 공연을 펼치며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줬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만남의 장, 지역의 축제가 됐다.
황금기는 1960~70년대였다. 서영춘, 백금녀, 이봉조, 하춘화, 정훈희 등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과 대중음악가들을 배출한 스타 등용문이자 종합 엔터테인먼트 업체였다. 단원은 270명에 달했다.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드라마와 영화, 스포츠, 음악 쇼 등에 환호했다. 급기야 1985년 큰 태풍 피해를 보면서 동춘서커스단은 존폐의 기로에 섰다.
동춘서커스단의 단장 박세환씨(81)가 동춘에 입단한 지 23년째였다. “대중문화예술의 원조이자 산실 역할을 해 온 동춘서커스단이 해체되는 걸 지켜볼 수만 없어” 박 단장은 1987년 동춘을 인수했다.
‘죽었다 살아났다’를 반복하며 2011년 현재의 자리에 짐을 푼 동춘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현재는 지역의 명물로 전국 각지에서 동춘서커스를 찾는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다. 연간 관람객만 15만명. 대부도의 자연경관과 함께 동춘서커스단의 볼거리가 더해지자 인근 상권은 더욱 살아났다.
흥망성쇠를 반복하며 안정 궤도에 들어섰지만 박 단장의 마음은 편치 않다. 서커스에 대한 지원이 여전히 부족하고 단원 양성이 어려워 서커스 단원은 현재 서른 명 안팎으로 크게 줄었다.
7년 전부터 한국 단원은 단 한 명도 없다. 중국 등 해외에서 계약을 맺어 단원들을 데려와 공연을 선보인다.
동춘서커스단의 명맥을 잇고 한국 서커스 활성화를 위해 박 단장은 공연장 인근에 부지를 마련해 서커스 아카데미와 박물관, 극장을 만들 계획이다. 우리나라 대중문화예술의 산실인 동춘의 역사를 잇고 브랜드를 키워내겠다는 각오다.
“우리는 대강할 수 없어요. 브랜드 가치를 지키고 살려야 하니까요. 앞으로 또 100년 써내려 갈 동춘의 역사를 여러분이 함께 지켜봐주세요.” 박 단장의 목소리에 강한 힘이 실렸다.
인생을 타는 서커스, 어른에겐 청춘을... 아이에겐 동심을
“여러분이 앉아 계시는 15m 상공에는 가느다란 철선이 하나 있습니다. 그 외에는 한 치의 땅도 없습니다. 지금부터 몇 년 전, 서독 서커스가 이와 똑같은 연기를 보냈을 때 여러분들은 ‘저것이 과연 사람이냐 귀신이냐’ 손바닥이 째지도록 박수를 쳤던 묘기~. 여기 동춘의 곡예사가 보여 드리는데 박수 하나 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계시는 분, 인정도 사정도 피도 눈물도 애국심도 없는 분들입니다.”
장내에 쩌렁쩌렁 하게 울리는 박세환 동춘서커스단장의 멘트가 끝나자 객석에선 떠나갈 듯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천장에 줄을 매달고 펼치는 실크 공중 곡예, 단체 모자 저글링, 변검변복, 몸에 끈만 매단 채 하늘에서 커플이 선보이는 공중 로맨스 등 공연마다 관객들은 마술에 걸린 듯 탄성을 토했다.
눈속임 없이 오로지 몸으로만 증명하는 정직한 무대. 매일의 연습과 땀, 고된 노력으로 빚어낸 무대. 자신의 한계를 매일 깨치고 성장해야 성공하는 무대. 때로는 상대만 믿고 몸을 던질 만큼 상호 신뢰가 있어야 설 수 있는 무대.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놀라운 서커스에 관객들이 환호하는 것은 재미와 신기를 넘어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곡예사들에게서 삶의 한 단면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인터뷰 박세환 단장 “100년 지킨 ‘서커스 사랑’... 미래 100년도 이어갈 것”
경주 출신인 박 단장은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63년 동춘서커스단에 입단했다. 그때만 해도 동춘은 스타의 등용문이었다. 이곳에서만 58년 근무한 박 단장은 1987년 당시 잠실 아파트 3채 가격에 동춘을 인수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박 단장은 “숱한 위기와 고비 속에서 동춘이 100주년을 맞았다니 만감이 교차한다”며 “앞으로의 100년을 위해선 아직 할 일이 많다”했다.
Q. 쉽지 않았을 텐데. 왜 동춘서커스단을 계속 이어갔나.
A. 서커스를 사랑했다. 남녀노소, 외국인 누구나 볼 수 있는 게 서커스다. 지방 공연을 가면 백발의 노모와 손자가 와서 함께 박수치고 즐긴다. 이런 공연이 또 없다고 생각했다. 흥행은 무조건 될 거고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엔 다 서커스단이 있다. 무엇보다 동춘은 한국 대중문화예술의 원조이자 산실이다. 그런 동춘서커스단이 해체되는 걸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대중문화예술의 원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끝까지 지켜내고 싶었다.
Q. 국내 유일한 서커스단이다.
A. 우리나라에선 서커스 하기가 매우 어렵다. 일부 문화예술에만 관심과 지원이 쏠려 있고 전통 대중문화예술인 서커스에는 관심이 없다. 중국은 서커스단만 600개이고, 관련 학교만 500개에 달한다. 그동안 서울과 경기도 등에서 시립서커스단을 만들려고 준비했지만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 남사당 이후 대중예술의 원조 역할을 한 게 서커스다.
Q. 그런 기적을 만들어 나간 원동력이 있다면.
A. 100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동춘이 어려울 때 이를 알려주고 존재의 가치를 보도해준 매스컴과 국민의 응원 덕분이다.
2008년 금융위기에 이어 2009년 신종플루로 지역 축제가 모두 취소되며 관객이 급감했다. ‘이제 정말 폐업하자.’ 그때 시민들이 되살려 주셨다. 2009년 12월23일 김포 실내체육관에서 눈이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마지막 공연을 하는데 1천300석이 매진됐다. 20일 공연 기간 내내. 어딜가도 1만5천원 쓰는데, 동춘서커스에 1만5천원 못 쓰나 하며 시민들이 살려 주신 거다. 이 같은 국민들의 지원과 사랑에도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
단원도 아무나 쉽게 할 수 없고 운영도 하는 게 쉽지 않다. 지자체와 정부 등의 지원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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