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원 세종사이버대 한국어학과 교수·한국어교육원장
여전히 쌀쌀해 춘삼월에 걸맞은 따뜻한 기운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확실히 봄이 좀 더 가까이 왔음은 느낄 수 있다.
영하로 내려갔던 기온이 영상으로 올랐고 간혹 눈으로 둔갑하기도 하지만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데다 그 비는 겨울 동안 건조하게 얼어 있던 대지를 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맘때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선가 옅은 흙냄새가 풍긴다.
물론 그것이 완연한 봄기운으로 바뀌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러다 순식간에 식물들이 싹을 틔우고 거기서 꽃이 피어나고 그럴 테다. 봄은 그렇게 대자연의 큰 흐름 속에서 우리들의 곁을 맴돌며 기쁨과 환희를 선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긴 시련의 끝에 좋은 날을 맞이하거나 개인적인 경사가 연이을 경우 봄이 왔다는 표현으로 그 상황을 비유하곤 한다. 대표적인 예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이상화 시인의 작품으로 이 시에는 나라는 빼앗겼더라도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만은 압제당할 수 없다는 저항의식과 당장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비애, 독립을 향한 열망 등이 혼재돼 있다. 그만큼 이 시에서 ‘봄’이라는 시어가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던지는 의미가 큰 것이다.
그런 봄이 2025년에도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지만 마음이 여전히 겨울처럼 얼어 있는 사람이 많을 테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걱정하며 주시하고 있을 정치적 혼란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고 심지어 그것은 매순간 새로운 국면으로 이어져 더 큰 혼란을 야기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거기다 경제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 장기화되면서 국민들의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진 지 오래고, 이런 가운데 미국 대선 이후 국제 정세 또한 급변해 세계 도처에서 심상치 않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TV나 인터넷 등의 매체를 통해 보는 지금의 세상에서는 봄이라고는 느낄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세상을 보는 눈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봐서는 절대로 길러질 수 없고 내가 보기 싫은 것도 봐야 균형 잡힌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주로 듣는 음악만 따로 모아 놓은 뮤직 플레이 리스트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플레이 리스트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번 신곡을 채워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기존에 만들어 놓은 플레이 리스트를 매번 똑같이 듣는다면 우리가 듣고 느끼는 음악은 딱 거기까지로 한정돼 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체감하지 못하게 된다.
다시 봄 이야기로 넘어가면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봄을 느끼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대중매체의 각종 소식에 무감각해지라는 것이 아니라 잠시라도 의도적으로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지금 그 주변으로 눈을 돌려 자연을 느껴 보라는 것이다.
자연은 내가 만들어 놓은 뮤직 플레이 리스트처럼 고정돼 있지 않고 매순간 역동적으로 변모하기에 그것을 관찰하면서 얻는 삶의 지혜는 생각보다 크고 깊으며 넓다. 자연은 인간의 욕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늘 거기에 존재하지만 매순간 변화무쌍하기에 우리 생활 속 곳곳의 자연을 관찰하다 보면 우주의 놀랍고도 경이로운 섭리를 깨닫게 된다.
그러한 자연 앞에서는 이 세상을 살다 가는 일개의 유한한 인간으로서 겸허해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떠난 세상에도 자연은 여전히 거기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봄은 그저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대자연에 다가갈 때 비로소 관찰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되니 말이다. 오늘부터 잠시 오가는 길에서라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앙상하게 서 있던 가로수나 식물들 혹은 내가 밟는 땅의 흙을 관찰해 보자.
그럼 이미 그들 속에서 움트고 있는 봄을 보게 될 것이며 더불어 얼어 있던 마음도 분명 한결 따뜻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연을 관찰하면서 과연 우리 사회에서는 무엇이 진정한 봄이고 그것이 과연 우리들에게 실제로 왔는지를 좀 더 깊이 고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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