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 광주 닻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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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함께한 닻미술관 외관 전경. 홍기웅기자

 

경기 광주시 진새골에 예술을 통한 창조성과 영성 회복을 기치로 2010년 10월 개관한 닻미술관(관장 주상연)이 있다. 닻은 성찰의 공간이자 치유의 공간이며 창조의 공간이다. 미술관 건물과 건물 사이에 만든 작은 정원의 우물에 놓인 화분에서 푸릇푸릇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왼편은 전시실이고 오른편은 카페다. 카페에 들러 따뜻한 차를 마시며 주상연 관장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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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미술관 주전시관에서 전시중인 이모젠 커닝햄 'STILLNESS' 사진전 전경. 홍기웅기자

 

■ 일상에서 발화하는 고요하고 투명한 사진 이야기

 

“2025년 닻미술관은 ‘일상에서 발화하는 고요하고 투명한 사진 이야기’로 한 해를 시작합니다. 크거나 작은 일상의 신화는 무거운 현실의 땅에 뿌려진 희망의 씨앗입니다. 예술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영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득 사진 속 빛나던 일상의 순간이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라고. 1인분의 삶, 그 안에서 오늘 하루의 빛을 잃지 않기를. 어둠 속 두 손을 모은 목련 꽃봉오리에 담긴 생의 기도가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문득 주 관장의 작품 세계가 궁금해졌다. 그의 작품집 ‘다른 방식의 존재 연습’에는 어떤 표정이 담겨 있을까. “이 책에는 지난 10여년 동안 내가 본 안과 밖의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한 번도 같지 않으나 반복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사진가로서 오르던 한 기둥에서 내려와 다양한 역할을 오가며 내게 익숙했던 것들이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열리는 것을 봤지요. 어떤 중요한 가치가 깨어지면 다른 가능성이 태어나고 모든 과정의 의미는 스스로 발견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작품을 살펴보며 ‘사진(寫眞)’이란 단어에 사물의 진실을 담는다는 뜻이 들어 있다는 작가의 말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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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미술관 주전시관에 전시중인 이모젠 커닝햄 'STILLNESS' 사진전 중 Magnolia Bud 작품. 홍기웅기자

 

■ 이모젠 커닝햄, 숲속에서 만나는 사진예술의 거장

 

한 장의 사진이 말을 걸어온다. 마음속에 간절함이 있기 때문일까. 벙글지 않은 목련 꽃봉오리가 절대자에게 기도하는 사람의 손처럼 보인다. 이 멋진 작품을 찍은 이모겐 커닝햄(1883~1976)은 어떤 작가일까.

 

“커닝햄은 20세기 현대 사진 미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미국의 여성 작가입니다. 미국 서부 사진을 이끌었던 F64 그룹의 창립 멤버로 활동한 그녀의 사진은 흑백 프린트의 우아한 톤과 순수한 조형미를 더해 사진으로 구현할 수 있는 차별화된 예술성을 보여줍니다. 아흔 살이 넘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은 그는 사진예술에 대한 고유한 세계관을 구축하며 세계 사진사에서 중요한 작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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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미술관 작가의방에 전시된 이모젠 커닝햄 작가의 예전 사진전 포스터 및 도록들. 홍기웅기자

 

오정은 학예실장은 그의 작품이 미국 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 게티미술관 등 세계의 주요 미술관에 다수 소장돼 있다는 사실도 들려준다. 이어지는 친절한 해설은 커닝햄이라는 작가의 매력에 빠져들기에 넉넉하다. “예술과 삶이 하나였던 자유로운 영혼, 그 시절 원조 보헤미안인 그녀에게 사진은 일상의 꿈 같은 것입니다. 커닝햄은 주체적인 여성으로 당당히 사는 법과 사진가로 살아가는 길을 스스로 만들고 세 아들의 어머니로, 사진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담아내는 예술가로서 홀로 빛나던 큰 별입니다.”

 

전시된 작품들은 일상에서 작가를 매혹한 것들인데 매일 마주하는 정원의 식물들, 음악이 흐르는 계단, 인간의 표정과 움직임, 특히 세월 따라 조금씩 변해 가는 작가의 얼굴이 많다. 그를 더욱 깊이 만나기 위해 다음 공간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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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미술관 뒷편에는 산책로를 따라 프레임 야생정원을 통해 사계절의 자연을 느낄 수 있다. 홍기웅기자

 

■ 작가의 집

 

전시관을 나와 건물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걸어가다 ‘프레임 야생정원’이라는 간판을 발견한다. 겨울을 견뎌낸 숲은 생명의 기운으로 출렁대고 있다. 푸른빛이 번져가고 있는 숲에 작은 집이 서 있다. ‘월든-숲속의 생활’이란 고전을 남긴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 지었던 오두막에서 영감을 얻어 최근에 지은 ‘작가의 집’이다. 작가의 집은 2025년 4월 현재 세계적인 여성 사진작가 커닝햄의 방이다. 방은 그녀의 사진 작품은 물론이고 일생을 살펴볼 수 있도록 알차게 꾸며져 있다. 중앙에 놓인 나무 책상과 세 개의 나무 의자에서 관람객들이 작가 커닝햄의 시선과 생각을 만나도록 하려는 기획자의 따스한 마음을 느낀다. 아홉 명의 노인 얼굴로 채워진 인상적인 포스터 앞에 선다. 제목이 ‘After Ninety’인데 정중앙에 커다란 안경을 낀 늙은 여성이 커닝햄이다. 90세가 넘은 노작가의 눈이 한없이 그윽하다.

 

오정은 학예실장이 포스터에 얽힌 사연을 들려준다 “커닝햄은 90대에도 카메라를 놓지 않고 계속 주위의 인물과 풍경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자신을 포함해 노인들의 얼굴을 즐겨 찍었는데 세월이 남긴 노년의 얼굴 속 주름과 반점, 시간의 흔적과 개별적인 존재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멋진 사진을 찍고 싶은 사람들은 커닝햄의 조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진을 잘 찍기 위한 공식은 시인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커닝햄의 말처럼 그의 사진은 시가 돼 우리 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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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미술관 프레임 전시관에서 전시중인 야리 살로 'MONOLITH'전. 홍기웅기자

 

■ 모놀리스, 나를 만나는 기억으로의 여행

 

작가의 집이 섬세한 여성이라면 프레임은 듬직한 남성처럼 느껴진다. 전시 공간인 프레임에는 핀란드의 사진작가 야리 살로의 ‘모놀리스 MONOLITH’를 전시하고 있다.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으로 진행되는 이 사진전은 5월18일까지 만나 볼 수 있다. “이 거대하고 깊은 감정을 어떻게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사진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살로는 핀란드 헬싱키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40대의 사진작가다. 심리학 박사인 그는 애착, 정체성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주관적이고 상징적인 것에서 출발해 기억과 의미를 해체하고 재해석하며 아날로그 암실 작업이 갖는 우연성과 그 물성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다양한 전시와 출판물, 수상 경력을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모놀리스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 의미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남는다. 그것은 온전히 풀리지 않는 신비의 영역이다.” 작가 살로의 말이다. 아들, 남자, 아버지로서 정체성을 탐구하고 그 기원을 찾아가는 작가 내면의 여정을 담은 이 사진은 작가의 버려짐, 부재, 원망, 수용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아버지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가족여행을 그의 아들과 함께 재연함으로써 남자로서, 그리고 후에 아버지가 되기 위해 중요했던 유년기 관계들의 의미를 재구성합니다. 작품의 중심에는 신비롭고 고독한 돌, 모놀리스가 있습니다. 돌은 회복력과 지속력을 상징하며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 문화와 심리적 주제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걸려 있는 작품들이 한결같이 작은 크기다. 어떤 의도가 있을까. 오 실장이 산책 중인 작가 살로에게 다가가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나누더니 이렇게 들려준다. “관람객이 작품 가까이서 바라보도록 유도하기 위해 작은 사진을 선택했다고 하네요.” 무슨 작품을 전시해도 어울리는 공간이라 작가들이 선호하는 곳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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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공방과 빛 공방은 프레임 야생정원 자연속 하나의 쉼터처럼 존재한다. 홍기웅기자

 

■ 사월의 숲은 싱싱하다

 

프레임 뒤편으로 아늑한 산길이 있다. 오늘 마주했던 작가와 작품들을 생각하며 천천히 숲으로 들어간다. 사월의 나무들은 물이 올라 더없이 싱싱하다. 가파르지 않고 완만하게 난 길은 산등성이로 이어진다.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이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기운을 얻고 작품을 구상했을까. 아흔이 넘도록 카메라를 들었다는 커닝햄의 작품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작품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며 렌즈를 통해 세상을 탐구했던 한 작가의 영혼과 대화를 나눈다. 전시실에서 나와 카페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며 나에게도 말을 걸어본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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