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오디세이] 가족의 소중함 되새기며

윤경원 세종사이버대 한국어학과 교수·한국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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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 부모를 잘 안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익숙한 말투, 즐기는 음식, 반복하는 농담이며 과거 에피소드까지 줄줄 꿸 정도였던 터라 오랜 세월 함께했으니 당연하다 믿었다. 그러나 요즘 연로하신 부모님을 뵐 때마다 그 믿음이 조금씩 흔들린다. 이런 나의 심리는 최근 스스로에게 자주 하는 질문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나는 정말 이 두 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정말 이 두 분이 내가 알고 있는 그분들이 맞는가. 이래서 인간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하나 보다. 그만큼 나는 내 부모를 충분히 안다고 착각했다는 것인데 돌아보면 그렇게 믿는 순간부터 오히려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게 됐던 건 아닐까 싶을 뿐이다.

 

이런 사유는 어느 날 치매안심센터에 어머니를 모시고 간 순간부터 시작됐다. 기억력 감퇴로 불안해하는 어머니의 팔을 잡고 센터 입구에서 ‘너는 곧 치매로 판명될 거다’라고 무언의 압박이라도 하는 듯 큼직하게 세워져 있는 입간판을 지나 조심스럽게 센터의 문을 여는 순간 뭔지 모를 애석함이 밀려 왔다. 어릴 적 나를 이끌던 든든한 그 손이 어느새 바싹 마른 고목처럼 야윈 모습으로 내 한쪽 팔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은 흐려지고 몸은 쇠약해지며 존재는 조금씩 빛을 잃는 것, 그것이 생의 순리임을 잘 알지만 그렇기에 더욱 뼈아픈 순간이었다.

 

사실 부모님을 병원이나 센터로 모시는 것도 쉽고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미루시거나 의사의 말을 흘려듣는 두 분을 볼 때면 정말이지 가슴이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 옛날 나 역시 비슷하게 투정을 부렸을 텐데, 이젠 상황이 역전되다 보니 늙음이란 나에게 더 이상 막연한 그 무엇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현실이 돼 나를 흔들었다. 그렇게 보면 계절마다 피고 지는 식물들은 얼마나 위대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의 흐름을 받아들이며 제 몫의 생만을 살아야 하는 순리에 순응하는 태도는 인간보다 더 단단하니 말이다.

 

한때 부모는 나의 전부였다. 그들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기준을 세웠다. 그러다 사춘기엔 그들을 시대에 뒤처진 존재로, 성인이 된 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멀어졌다. 그러다 이제야 약해진 부모를 바라보며 그들도 나처럼 흔들리며 사랑했던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두 분의 고집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방어였고 어설픈 조언은 마음 깊은 곳의 애정 표현이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자식들은 늘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뒤늦은 후회만을 안고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매일 낯선 가족을 마주하고 변해 가는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며 새롭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산다. 그래서 결국 가족을 안다는 믿음은 때로는 착각일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해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내기 쉽지만 바로 그 익숙함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서로를 완벽히 알 수 없어도 함께 걷는다는 것, 이해가 부족해도 끝내 품는다는 것. 그 따뜻한 반복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이 가벼운 듯 무거운 마음을 안고 조심스레 내일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나의 부모도, 형제들도 다들 그러하겠지 하고 위안을 삼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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