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20년대(golden twenties)라고 불렸던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은 각종 문화예술과 학문, 인권에 대한 제반 논의, 그리고 오늘까지도 법의 기본이 되는 ‘바이마르 헌법’이 만들어졌던 꽃 같은 시절이었다. 물론 1차대전의 패전국으로 어마어마한 배상비를 승전국에 물어야 했고, 전쟁의 상흔을 치유할 방법을 찾기도 전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국민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묻지마 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이 독일판 ‘묻지마 범죄’의 대상은 누구였을까?
게오르게 그로츠(George Grosz)나 오토 딕스(Otto Dix)의 당시 그림들 속에는 이유도 없이 살해당한 익명의 여성들이 매우 많이 등장한다. 거리에서, 거실에서, 자신의 침대 위에서 피를 흘리고 살해당하는 여성들의 그림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휩싸였던 절망의 광기를 보여준다. 그로츠의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연작 중에는 토막 살해된 여성의 시신들이 뒹구는 가운데 태연히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1920년대의 문화 연구자들은 이 현상에 대해 사회의 온갖 모순에 대한 손쉬운 복수방법이 여성에 대한 테러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대신해 직업전선에 나선 여성들은 남성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로 여겨졌고, 일거리를 찾을 수 없는 여성들이 거리의 매춘부로 전락해 성병을 옮기는 등의 현상들 역시 여성을 사회모순의 근원으로 돌리는데 한몫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패전으로 인한 가난이 여성의 탓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모든 살인사건의 정황들은 우발적으로 구체적이었다. 여성들은 그저 취약한 희생양이었던 것일 뿐이다. 마치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나 2021년 서울 노원에서 일어난 세모녀 살인사건의 경우처럼 말이다.
세 사람을 살해하고 그 살해현장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는 범인의 행적은 일반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에 그가 가지고 있던 정신적 성향의 문제가 원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이러한 ‘묻지마 범죄’가 줄곧 여성을 표적으로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제대로 분석하는 기사 한 줄 보기 어렵다.
전봇대나 길바닥에 ‘여성 안심귀갓길’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아, 이 길은 위험하다는 뜻이로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도 있으니 주변을 잘 살피며 지나가야 한다는 공포심이 생겨난다. 그날 그 순간 내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든다. 백 년 전에도, 백 년 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제는 ‘묻지마 범죄’에 대해 사회 전체가 근본적인 물음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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