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서 출토된 ‘주먹도끼’ 구석기시대 ‘최고 히트상품’ 인류에 준 위대한 선물
세계인이 인정하는 문화유산인 수원 화성과 도자기 등 화려한 문화유산도 경기도에 집중돼 있다. 이 같은 옛 경기도의 우수성을 되새기며 4차 산업혁명과 통일 등 대한민국이 맞이할 거대한 문명전환에 방향성을 제시해야 할 때다.
이에 경기 새천년(2018년)을 앞두고 세계 인류사를 뒤흔든 경기도 문명원류 현장을 돌아봤다.
■ 전 세계 구석기 연구에 대전환을 불러일으키다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전곡 선사유적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이자 가장 큰 규모의 유적지이다. 현재 국가사적 268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무엇보다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형(形)의 주먹도끼가 발견되면서 세계를 뒤흔들었다.
유적 발견 과정부터 드라마틱했다. 1978년 미군 병사 그렉 보웬은 풍광이 수려해 지금도 인기 있는 한탄강 유원지에 소풍 갔다. 그는 강변에서 돌 하나를 발견해 당시 서울대학교 박물관장이던 고(故) 김원용 교수에게 신고했다.
이후 김 교수와 구석기학자인 영남대학교 정영화 교수 등으로 꾸려진 조사단이 지표조사를 하고 전곡리가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전기 구석기 유적임을 확신했다. 이를 저명한 프랑스 구석기 학자인 프랑소와 보르드 등의 국내외 학계에 알렸다.
이듬해부터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와 자연과학적인 조사를 진행했다. 2011년까지 17회의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긴 유적 조사 기간 동안 세계적인 구석기 고고학자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저명한 이들의 방문은 전곡 선사유적지의 가치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주먹도끼는 타원형 또는 약간 길쭉한 모양의 돌을 양쪽으로 가공하여 끝이나 측면에 날을 세운 것으로서 이른 시기의 구석기시대에 출현한다. 프랑스 생따슐(St. Acheul) 지방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 석기 공작이다. 약 140만 년 전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콘소 가둘라 유적에서 등장해 오랜 시간 지속하다가 약 10만 년 전쯤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타원형 또는 삼각형 모양으로 양쪽 면을 모두 고르게 손질하여 석기의 옆면이 마치 두 손바닥을 모은 모습을 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른 시기의 것들은 거칠게 가공한 것들이 많았지만, 점차 정형화된 것들이 많아졌다.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석기였기 때문에 흔히 ‘맥가이버 칼’로 부르기도 한다. 나무를 다듬고, 짐승의 가죽을 벗겨 내고, 고기를 발라내고, 뼈를 부수는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에게는 ‘만능’ 석기인 셈이다. 특히 돌을 칼처럼 날카로운 도구로 사용하려고 다이아몬드 형태로 돌의 양쪽을 떼어낸 것으로, 고대 인류의 지능을 입증하는 유물로 유의미하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도 초기 아슐리안형이 많이 보이지만 석영 석재에도 불구하고 전면을 가공한 타원형의 주먹도끼가 나타난다. 특이한 점은 가로날도끼도 상당수라는 점이다. 주먹도끼 이외에도 잘 다듬은 찍개와 피크들이 많이 나타났으며 여러면 석기, 긁개, 홈날 등의 석기들이 출됐다.
전곡리 유적에서 이 주먹도끼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선사고고학자였던 모비우스 교수(H. Movius)는 인도의 동쪽 즉, 동아시아에는 양면가공을 하여 잘 만든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를 토대로 서양의 학자들은 그것이 곧 동서양 인종의 근본적 차이를 방증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천에서 출토된 주먹도끼로 그 주장은 힘을 잃었고, 세계 구석기시대와 주먹도끼 연구에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이 주먹도끼가 발견된 이후에 아슐리안 석기 공작을 재평가하는 수많은 논문이 나왔다. 현재까지도 동서양의 아슐리안과 아슐리안형 석기 공작에 대해 논쟁이 진행 중이다.
전곡리 선사유적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밝히는 자료로 한국과 동아시아 지역의 구석기 문화연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지역은 한반도의 지질을 남북으로 나누는 추가령 지구대의 남서부에 해당하는데, 한탄강은 이 지구대를 따라 흐르며 한강으로 흘러든다. 한탄강은 한때 계곡의 바닥을 이루었던 현무암 대지를 침식하여 깎은 단애 그 아래를 흐르고 있으며, 현무암 대지는 오랫동안 침식을 받은 낮은 구릉이 있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전곡리 유적은 신생대에 분류된 현무암반 위에 형성된 퇴적물 속에서 발견됐다. 현무암은 현재의 한탄강 상류인 북한 평강 지역에 있는 화산인 오리산에서 넘쳐흘러 한탄강과 임진강을 따라 강바닥을 덮었던 것이다.
이 현무암은 신생대의 플라이스토세 후반인 50만 년 전에서 15만 년 전 사이에 몇 차례 분류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전곡리 유적의 바닥을 이루는 현무암은 50만 년 전의 것으로 연대가 확인됐다.
현무암 위의 퇴적물도 옛날의 한탄강이 흘렀을 때 형성된 것이며, 이 퇴적물의 상부 점토층에서 석기가 집중되고 있다. 퇴적물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현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홍수가 범람했을 때 이뤄졌다는 학설, 멀리서 바람에 불려온 것이라는 설, 부근 지역에서 쓸려 내려 왔다는 설 등이 있다. 최근에는 시베리아나 중국의 북부 건조지역에서 날아온 뢰스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 중 화산재는 화산이 폭발할 때 연기나 먼지처럼 나오는 작은 유리질의 물질이다. 성층권 이상으로 분출해 제트기류를 타면 바람에 날려 넓게 퍼져 나가 멀게는 수천㎞까지 떨어진 지점에 쌓이기도 한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세 가지 화산재도 일본 큐슈 지방의 화산에서 불어온 것이다. 화산재는 모양이나 성분을 가지고 기원 화산을 판단, 그 분출연대도 알 수 있다.
전곡리의 최상층부에서 발견된 아이라 탄자와(AT) 화산재는 대체로 2만5천년 전에서 2만9천년 전 무렵이다. 지표하 1m 지점에서 발견된 키카이 토주라하라(K- tz) 화산재는 9만년 전에서 9만5천 년 전으로 알려졌다. 한반도의 백두산 화산재 중에도 45만 년 전으로 알려진 것이 있으며 전곡리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도 전곡리 유적의 점토층의 아랫부분에서 발견된 석기 공작은 35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전곡리의 구석기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전문가들이 그리는 생활상은 이렇다. 전곡리를 비롯한 한탄강과 임진강 일대에 고인류들이 살고 있었을 때의 한탄강은 지금보다 넓었다. 물을 먹으려고 강에 내려오는 동물들을 사냥하고, 산과 들 그리고 강가에 자라는 식물들과 열매로 먹이를 구했다.
겨울에는 추위를 막으려고 바람막이 움막도 지었다. 먹이를 따라 이동성 생활을 했다. 전곡리나 다른 유적에서 나오는 석기들은 모두 이들의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면서 남긴 것이다. 오늘날의 DMZ 안의 자연환경은 당시 고인류들의 생활환경을 짐작게 한다.
전곡리 유적의 어떤 지점에서는 수백 점의 석기가 나온다. 이를 두고 해당 지점은 분명히 동물을 도살하거나 사냥과 채집에 필요한 석기들 만들었던 장소로 본다. 일부 지점에서는 큼직한 자연 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냇가에서 여러 사람이 합동으로 옮긴 것으로 당시의 노동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왜 큰 돌이 필요했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무한한 상상을 펼치게 한다. 경기도의 연천 전곡유적지는 세계구석기 연구의 대전환을 가져온 동시에 그 땅 위에서 이뤄진 구석기 인류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그 원류에서 새로운 대전환을 그려본다.
류설아기자 <자료 제공 : 전곡선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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