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전초기지 인천] Report 1 남북상생

연평 해병 물샐틈 없는 경계 ‘긴장의 섬’
평화로운 남북 상생 꿈꾸는 ‘희망의 섬’
도발 스톱… 해상파시 공생 ‘미래의 섬’

연평도 해병부대
연평도 해병부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서해 5도 주민들의 남북 화해 분위기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지난 7월 중순께 국방부는 군사분계선에서 일체의 적대행위 중지를 위한 남북군사당국회담 개최 제의를 발표했으며 대한적십자사도 이산가족 상봉행사 개최 등 인도적 현안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 적십자회담을 판문점 내 평화의 집에서 열자고 제의한 바 있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서해 5도 주민들은 정부 차원의 화해 분위기가 민간 차원까지 확대돼 서해 북방한계선 인근 해상에서 해상 파시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2010년 북한의 방사포 포격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연평도. 

해병대 연평부대가 연평도를 중심으로 북한의 군사도발을 막기 위해 연일 긴장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해병대 연평부대 가장높은 곳에 위치한 OP(Observation Post·관측소)에서는 불과 3㎞ 거리에 있는 북한의 석도와 갈도(5㎞), 장재도(7㎞) 등이 흐린 날씨에도 관측됐다. 

날씨가 좋으면 멀리 황해도 등산곶이 보일 정도로 최 접경지역인 연평도. 연평포격 이후 우리 군은 요새화 진지를 구축, 물샐틈없는 경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요새화 진지를 따라 올라가니, 경계초소가 나왔다. 경계초소에는 2인 일조로 해병대 연평부대원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경계초소에서 보이는 연평도 북쪽해변은 하얀 백사장이 눈에 띄었다. 

연평도에 있는 해수욕장이 백사장이 아닌 자갈밭인 점을 감안하면, 통일 이후 안보체험관광단지로 조성되면 군사지역에 있는 백사장을 품은 해안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들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군 관계자도 개인적인 생각이라며 “통일이 된다면 이곳 군사지역으로 묶인 해안이 대규모 관광지로 개발될 수 있지 않겠는냐”고 귀뜸했다.

안보교육관
안보교육관
■ 해상파시, NLL 인근 해상에 바지선 띄워 남·북 수산물 판매 ‘바다위 어시장’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5도가 긴장의 바다에서 평화의 바다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해상파시’를 통해 일종의 바다 위 개성공단을 구축해야 한다는 견해에 힘이 실리고 있다. 

통일 이후 서해5도가 대규모 해상관광단지로의 변모를 꿈꾼다면, 통일을 준비하고 우리 바다를 위협하는 중국어선을 막기 위해서 남북이 협력할 수 있는 길이 바로 해상파시라는 것이다. 

해상파시란 바다 위에 부선(바지선)을 띄워 북한어선이 잡은 수산물과 우리 수산물을 함께 판매하는 해상 시장을 의미한다. 조업은 남·북한이 자체적으로 하되 중간지대에 시장을 열어 교류하면 양 국가간 경제적 이익을 꾀할 수 있다. 애초 연평도는 조기파시로 유명했다. 

연평도 조기파시는 5~6월에 열렸는데 이때 섬마을에는 어선과 고기를 사는 상선 등 수천 척이 몰려들었다. 선주와 선원, 전주(錢主), 객주(客主), 색주, 색시들이 음식과 술 옷 장사, 선구점, 약사, 이발사 등 인구 3천명에 불과한 섬에 수만 명이 들어와 시장처럼 북적거렸다.

 

■ 남북 해상교류 긴장 완화·중국어선 불법조업 해결 ‘일석이조’

정부가 지난달 남북 민간교류 추진을 통한 5·24조치 유연화 입장을 발표하면서 서해5도를 평화의 바다로 탈바꿈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서해5도 주민들이 “단계적인 경제 교류를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단순 퍼주기식 교류가 아닌 남·북한이 교류에 따른 실질적인 경제 보상을 얻어 이를 통해 평화 장착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이들의 견해다. 단계적 경제교류는 경색된 남북 관계 개선은 물론, 남북 해상 교류와 중국어선 불법조업 문제 등을 해결할 가능성이 크다. 

단계적 교류에 있어 해상 파시를 빼놓을 수 없다. 조업은 남·북한이 자체적으로 하되 중간지대에 시장을 열어 교류하면 양 국가간 경제적 이익을 꾀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른바 ‘바다 위의 개성공단’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통일을 준비하는 서해5도의 방향이다.

조개잡이
조개잡이

박태원 연평도 어촌계장은 “불법조업 중국어선들이 남한의 어장을 싹쓸이 조업해 어장이 황폐화됐다”며 “해상 파시를 통해 서해5도 어장이 더 이상 중국어선에 의해 파괴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배복동 대청도 어민회장도 “서해5도 해상은 아무래도 옛날에 중국배가 와서 많이 망가졌다. 그런 것도 없애기 위해서는 남북이 해상파시를 이뤄내야 한다”며 “해상파시가 이뤄지면 NLL인근까지 어장을 넓힐 수 있게 되고 이는 어민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또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北 미사일 도발 한반도 경색 국면 벗어나야 본격적인 공론화 가능

다만, 서해5도 해상 파시에 대해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5도 주민들이 아직은 실감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쉬운 점으로 꼽힌다. 연평도에서 식당을 하는 주민 김모씨(48)는 “조기 파시는 예전에 있었다는 말을 부모를 통해 들어봤지만 서해5도 해상 파시는 금시초문”이라고 말했다. 

연평도 해경서 관계자도 “어촌계장을 통해 해상파시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면서도 “솔직히 주민들이 공동어로구역이니, 해상파시니 하는 것을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평화공원
평화공원
이처럼 서해5도를 평화의 바다로 만들 그 전초 단계인 해상파시가 막상 서해5도 주민들 모두가 알지 못하는 이유는 지난 정권동안 긴장속에서 대치했던 남북관계에 기인한다. 남북이 경색된 현 시점에서 당장 실현시키기 어려운 ‘해상파시’를 모든 주민에게 알리기에는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허선규 서해5도 생존과 평화를 위한 인천시민대책위 공동위원장은 “서해5도를 위기와 긴장의 바다가 아닌 평화와 통일의 바다로 만들기 위해서는 해상파시의 역할이 중요하다”면서도 “지난 정권에 이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경색된 남북관계가 화해 모드로 전환돼야 서해5도 주민들 모두에게 해상파시에 대해 터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영민기자

사진=장용준기자 

조기박물관
조기박물관

인터뷰 한국전쟁 피란 실향민 할머니들

생전에 고향갈 수 있겠어?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멈춘 정전협정 64주년 기념일인 7월 27일 찾은 연평도는 미사일 도발 등 북한의 위협에도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2010년 연평도 포격 이후 7년이 흐름 지금, 한국전쟁 때 피란온 실향민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통일의 염원이 커져가고 있었다. 

 

황해도 연백군에서 피란온 김정녀 할머니(79)는 반백년이 넘게 지났어도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 할머니는 “갑자기 전쟁이 나서 가족이 같이 (연백에서) 나왔는데 아무래도 섬이 안전할 것 같다는 아버지 말씀에 배를 타고 빠져나왔어”라며 “원래 연평도가 아닌 저기 소섭이라는 곳에 숨어들었는데 거기서도 북한군이 쳐들어와서 다시 배타고 연평도로 도망치듯 왔어. 그때 가족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나 혼자 남은 거야”라고 말했다.

 

그렇게 연평도에 정착한 김 할머니는 22살이 되던 해 같은 실향민인 남편 유성춘씨(사망)를 만나 4남매를 연평도에서 키웠다. 피란와서 벌어먹기조차 힘들었다는 그는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했다. 인근 갯벌에서 굴 따다 팔아먹기도 했고 남편이 배타고 잡아온 물고기를 손질해 파는 등 말 그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다. 반백년을 연평도에 살았지만, 여전히 그리운 고향 연백에 가고 싶다는 게 김 할머니의 소원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지 10년도 더 넘었다”고 말하던 김 할머니는 “통일이 되면 (연백에)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결국 통일되는 것도 못보고 돌아가셨어. 나도 고향땅 한번 밟아 보지 못하고 갈까 봐 걱정돼”라며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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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를 앓고 있다는 안숙자 할머니(77)는 고향인 평안남도 진남포 이야기를 할 때는 기억이 또렷한 듯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 안 할머니는 “10살쯤 가족 따라서 고향을 떠나 서울 마포로 왔는데 그때 전쟁이 나서 친정 고모가 있는 연평도로 피란을 왔어. 당시 할머니, 할아버지랑, 부모님이 함께 피란을 떠났는데 시간이 돼도 배가 뜨지 않아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라고 피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실향민 이금화 할머니(88)는 황해도 해주에서 보통학교 6학년 졸업하고, 고등과 2년까지 8년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전쟁이 나면서 당시 육섬이라고 불리던 섬으로 피란했다. 이 할머니는 “당시 친정이 해주에서 정말 잘살았어. 

그러다 전쟁이 나서 섬으로 왔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 전쟁 때 배가 두 척이나 있었거든 육섬으로 갔다가 다시 덕적도로 이동했는데 그때 할머니, 할아버지 다 돌아가셨어”라며 전쟁 상황을 담담히 설명했다. 

 

“해주에서 나온 지 60년이 넘었는데 이제는 연평도가 제2의 고향”이라는 이 할머니는 “통일돼서 해주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 하지만, 죽기 전에 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어”라고 말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주영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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