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불황에 뜨는 대중문화

정민아 성결대 영화영상학과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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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세션 팝(Recession Pop)’이란 경향이 있다. 이는 2007~2009년 세계 금융위기 시기에 미국에서 유행하던 댄스 팝으로 현실 도피와 파티 분위기를 담은 낙관적 분위기, 빠른 속도와 중독성 있는 멜로디를 특징으로 한다. 레이디 가가의 ‘포커 페이스(Poker Face)’, 비욘세의 ‘싱글 레이디(Single Ladies)’, 블랙아이드피스의 ‘아이 가타 필링(I Gotta Feeling)’ 같은 음악이다. 최근 혹독한 경기 침체를 경험하지 못한 Z세대 사이에 2000년대 중반에 급부상했던 리세션 팝 스타일이 틱톡을 타고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빠른 비트의 밝고 경쾌한 음악은 경제 위기일수록 빛난다.

 

사회·경제적 불안정, 인플레이션, 실직,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압박을 받는 사람들이 낙관적이고 흥겨운 음악을 찾는 경향은 어쩌면 생존 전략에 가깝다. 진지하기보다는 감각적 위안을 원하는 현상은 대중문화를 통해 일시적이나마 돌파구를 찾고, 그리고 또다시 현실을 헤쳐 나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 대공항 정도의 침체 상황은 아니지만 질병, 전쟁, 경기 불황, 환경 문제 등 인간 생존의 4대 불안 요인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이 두려운 현실과 대비되는 명랑하며 유머러스한 대중문화를 더 찾게 된다. 현실이 암울할수록 과거나 상상의 공간으로 향해 복고풍, 아날로그 정서, 인디 감수성, 회피, 몽상, 유머에 반응한다.

 

이 같은 현상은 영화에도 나타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세계적 유행을 구가하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가능한 일이다. 유행에 빠르게 반응하는 한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영화산업이 침체 상황인데 조정석표 유쾌 발랄한 코미디 ‘좀비딸’이 모처럼 흥행하고 있다. 올해 흥행 상위권에 있는 영화는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F1 더 무비’, ‘야당’, ‘히트맨2’ 같은 아드레날린이 빵빵 터지는 흥겨운 액션 장르다.

 

‘리세션 영화’라는 공식 장르는 없지만 지금과 같은 현상은 영화사에서 낯설지 않다. 1930년대 대공황기에 흥겨운 춤과 노래, 가벼운 로맨스로 이뤄진 뮤지컬, 그리고 슬랩스틱 코미디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위안을 줬다. 한국 IMF 외환위기 시기에는 밝고 경쾌한 로맨틱 코미디와 조폭 코믹액션으로 잠시나마 시름을 잊었다.

 

제작 투자가 위축되고 공공 지원 예산이 감소하며 유통 채널이 재편되면서 더 어려워진 한국 영화계에 거장들의 신작이 신통치 않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가 있다. 그러나 장르가 획일화되고 같은 패턴이 반복되며 컴퓨터그래픽(CG) 남발과 캐릭터 전형성으로 범벅된 주류 영화에 대중이 지쳐 있는가 하면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영화가 끊이지 않고 개봉하고 있다.

 

작고 가벼운 소비를 선호하는 현실에서 올해 칸영화제 ‘라 시네프’ 부문(전 세계 영화학교 학생 작품 대상) 1등을 한 허가영 감독의 단편영화 ‘첫여름’,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가 하반기 관객과 만난다. 여성 노인의 욕망, 그리고 현실의 불황을 반영한 블랙코미디가 어떤 개성적인 영화예술로 표현될지 기대된다. 두 영화가 몰고 올 시원한 바람과 함께 다시 활기를 얻을 극장가를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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