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 잇는 100년 기업] 수원 매산시장 별미떡집

2대에 걸쳐 전통방식 고수
‘찰떡궁합’ 대물림 떡집… 입소문 비결은 손맛과 정성

수원 매산시장 내 ‘별미떡집’에서 김성복•이기순 씨 부부와 막내아들 김창모 씨가 함께 떡을 만들고 있다. 40여 년간 변치 않는 맛을 고수하며 떡을 만들어 온 김 씨 부부는 “누구든 배불리 맛좋은 떡을 먹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라며, “요즘 아들의 젊음이 시장에 활기를 더하고 있다”며 웃었다. 김시범기자
수원 매산시장 내 ‘별미떡집’에서 김성복•이기순 씨 부부와 막내아들 김창모 씨가 함께 떡을 만들고 있다. 40여 년간 변치 않는 맛을 고수하며 떡을 만들어 온 김 씨 부부는 “누구든 배불리 맛좋은 떡을 먹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라며, “요즘 아들의 젊음이 시장에 활기를 더하고 있다”며 웃었다. 김시범기자
수원 매산시장에는 2대에 걸쳐 손맛을 내는 별미떡집이 있다. 

김성복 씨(68), 이기순 씨(65) 부부가 운영하는 이곳은 이제 아들 김창모 씨(36)가 가업을 물려받으려고 함께 일하고 있다. 이미 소문을 타고 시장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사러 오는 사람이 있을 만큼 ‘유명 맛집’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게는 소박하다. 

기계 5대 가운데 딱 한 대만 자동화 기계이고 나머지는 모두 반자동이다.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을 만큼 세월이 흘렀고 자동 시스템이 척척 해내는 시대라 해도, 사람 손을 거쳐야 맛이 난다는 별미떡집만의 철학 때문이다. 

작은 점포가 옹기종기 모인 매산시장을 찾아 김 씨 부부와 아들 창모 씨를 만났다. 소박하고 덤덤하게 자신들의 전통과 맛을 이어나가는 이들의 장사 철학과 자부심은 거상(巨商)이었다. 

■ 창모씨와 네 남매 모두 키워낸 별미떡집

1975년 12월. 한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이 파고든 어느 날, 27살의 성복 씨와 24살의 기순 씨는 100일도 안 된 큰딸을 업고 안양에서 수원으로 넘어왔다. 노상 일을 하던 부부는 먹고살기 위해 수원 매산시장의 옛 이름인 역전시장에서 떡집을 차려 터를 잡기로 했다. 

보증금 10만 원에 월세 5천 원짜리 점포의 ‘공주떡집’. 기계도 하나 없이 떡을 찧을 절구 달랑 하나 빌려온 게 다였다. 변변한 도구는 없었고 당시 시장에 떡집만 해도 수 곳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자신 있었다.

 

형님들이 이미 떡집을 하고 있어 그동안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게 있었다. 개피떡, 반달떡을 만들려고 절구로 쳐서 손으로 밀어내고 만들어 대야에 싣고 나가 도매로 팔았다. 장사가 만만치는 않았다. 갓난아기를 업고 기순 씨도 함께 가게에 나가 튀긴 떡으로 끼니를 때우며 장사를 도왔다. “어찌 말로 하다겠어요. 첫날 판 게 350원어치야…. 그 뒤로도 장사가 안돼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당시를 떠올리던 성복 씨의 눈가가 어느새 빨개졌다.

 

몇 년 시간이 지나자 가게도 점차 자리가 잡혔다. 토ㆍ일요일 잔칫날엔 주문이 밀려들어 왔다. 부부도 신바람이 나 더욱 열심히 일했다. 비수기인 여름에도 하루 2~3시간만 잘 수 있을 만큼 일은 고되고, 바빴다. 연탄불을 피워서 시루를 만들고 부부가 손으로 모든 작업을 마칠 때면 밤 11시가 훌쩍 넘었다. 그러곤 새벽 2시에 일어나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네 남매 모두를 키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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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지 않았던 가업승계 결심…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

매산 시장에서 40여 년간 이곳저곳 다니며 장사를 하다 보니 가게는 연탄불에서 석유 버너, 가스를 넘어 이제 전기를 사용할 만큼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부부는 힘에 부쳤다. “자식 중 누가 물려받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는 김 씨 부부는 떡 장사를 하면서 그 누구보다 자식들 교육엔 신경 썼다. 

각자 대학을 나와 갈 길을 가는데 쉽게 자식에게 가업승계를 건의할 자신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물린 탓인지 명절에도 떡이 들어간 떡국을 먹지 않는 자식들이었다. 그러던 중 막내아들 창모 씨가 “내가 해보겠다”고 나섰다.

 

어찌 보면, 아픈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창모 씨의 세 번째 손가락은 다른 손가락들과 크기가 다르다. “창모가 3살 때 내가 업고 떡을 만들다가 포대기랑 아기를 내려놓고, 잠깐 딴 일을 하는데, 포대기가 기계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걸 빼낸다고 하다가 같이 손가락이 들어간 거야. 얼마나 아팠을꼬. 근데 울지도 않았어.” 어머니 기순 씨가 말했다. 

어릴 적 떡 기계에 손가락이 절반가량 절단된 사고를 당한 창모 씨는 7년 전인 29살부터 일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는 식품가공학과를 다니고, 대학교는 식품영향학과를 나왔다. 어찌 보면, 떡집과도 맞는 셈이다. 

대학 졸업 후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던 창모씨는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일을 조금씩 도왔다. 그러기를 몇 년 하다 보니 ‘내 일이 됐다’고 한다. “결심하기 전까지 쉽지는 않았어요. 부모님께서 고생하신 모습을 워낙 많이 본 데다, 떡 장사는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었어요. 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죠. 많이 고민했어요.”

 

그런 창모씨는 이제 창업자인 부부에게 ‘기술자가 다 됐다’는 말을 들을 만큼 실력자가 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난 7년간 하루에 1번가량 쉬고 매일 떡집에서 16시간씩 보냈다. 이제 별미떡집엔 맛 전문 기순 씨가 인절미와 절편을 만들고, 아버지 성복 씨는 바람떡과 꿀떡을 만든다. 아들 창모 씨는 시루떡, 백설기 등을 만들고 떡을 찧는 일, 각종 다양한 일을 맡아 가업승계를 준비 중이다.

■ 전통의 손맛 잇고 젊은 트렌드 반영한 사업 계획

워낙 단골이 많은 떡집이다 보니 아들 창모 씨를 알아보고 응원하는 이들도 많다. 창모 씨는 기존에 있던 단골손님들에게 맛있다며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앞으로 자신이 이곳을 이끌어 나갈 생각에 설렘도 크지만, 어깨도 무겁다. “부모님께서 힘겹게 일군 사업을 제대로 해야죠. 하지만, 저만의 방법과 전략을 찾아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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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창모 씨는 앞으로 자신이 운영하게 되면 혼자 떡집을 운영할 계획이다. 종업원을 둘 형편이 될 때까지 욕심 내지 않고 할 수 있는 한에서 사업을 일궈나간다는 것이다. 자신이 운영하고서도 떡집이 안정되면, 요즘 트렌드에 맞춘 떡 카페를 만들 계획도 있다.

떡집에서 만든 떡을 카페에 납품해 이원화 시스템으로 가게를 운영할 예정이다. 가업승계를 위해 일을 배우는 데 전념하는 그는 요즘 시장 상인회에도 활발히 활동하며 젊은 활기를 시장에 전파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경쟁력이 뭐냐는 질문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경쟁보다는 시장 주변 가게와 상인들과 함께 커 나갈 거예요. 시장이 살아야 우리 떡집도 살고, 옆 가게가 잘 돼야 우리 가게에도 손님이 오는 거니까요. 요즘 전통시장이 어려운데 우리 떡집뿐만 아니라 다른 가게도 함께 흥할 방법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 손님에겐 더 많이, 이익은 적게…아버지의 당부

자신만의 생존 전략과 현재를 살아내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창모 씨가 딱 하나 바꾸지 않는 게 있다. 바로 손맛을 내는 비법이다. 별미 떡집은 지금도 팥을 기계에 넣어 빻지 않고 직접 삶아 가게에서 손으로 빻는다. 40여 년 전 처음 ‘공주떡집’으로 김 씨 부부가 떡집을 열었던 당시 그랬듯 전통의 맛을 지키기 위해서다. 

명절에 그 많은 물량을 처리해야 하지만, 송편은 모두 손으로 만들어서 판다. 창모 씨는 “사람 손을 거쳐야 맛이 나는 건 세월이 변해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며 “자동화된 기계를 사용하기보단 손으로 직접 반죽을 넣고 앙금도 하나씩 집어넣고 해야 쫄깃한 맛이 난다. 이 방법은 당분간, 아마 오랜 세월 변치않고 지켜나갈 것 같다”고 말했다.

 

손맛을 내는 전통 시스템은 이어가지만, 창모 씨가 맛을 내는 또 다른 비법이 있다. 성모씨 부부가 연륜으로 맛을 낸다면, 그는 젊은이답게 정확성으로 맛을 낸다는 것. 저울에 재 비율을 일정하게 맞추다 보니 오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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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복 씨는 “우리는 구형이고 아들은 신형”이라며 “이제 신형에 맞춰서 해야 하지만, 그동안 지켜온 것을 또 다른 가치도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아들을 보며 말했다.

바로 서민들이 먹기 좋게 가성비 좋은 떡을 만들고, 누구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맛좋은 떡을 만들어 달라는 거다. 참기름도 여전히 직접 짜다가 쓰고, 좋은 쌀, 좋은 재료만 고집해 손님들에게 넉넉히 인심 좋게 판매하던 김 씨 부부였다.

 

성복 씨는 “아들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양도 많고 저렴하게 판매해서 누구든지 배불리 맛좋은 떡을 먹을 수 있게 했으면 좋겠어요. 장사가 뭐 별거 있나요. 소비자 눈 속이지 않고, 좋은 재료 써서 정량으로 파는 거죠. 이익은 적게, 손님에게 더 크게 베푸는 거, 그게 장사꾼이 흐뭇한 거거든요.”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창모 씨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자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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