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찬 기자
단지동맹원 조응순 선생의 조카 조순호씨가 마침내 다른 독립운동가 핏줄을 만났다. 안중근 의사 탄신 145주년이었던 지난 2일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탄신 145주년 기념식'을 통해서다. ■“독립투사 후손, 가족처럼 느껴져...이렇게 만나니 고맙고 기뻐” “새벽 5시에 일어나 기차를 타고 왔습니다.” 앞서 경기일보는 조응순 선생의 조카 조순호씨의 사연(본보 8월15일자 1면·3면)을 보도한 바 있다. 이후 안 의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운영해온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경기일보에 연락을 취해왔다. 조씨를 만나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이들의 만남이 성사된 곳은 기념식 현장이다. 당일 경기일보 취재진이 도착했을 때, 조순호씨는 이미 기념식장 앞에 앉아 대기중이었다.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던 조씨는 떨리는 듯 두 손으로 무릎을 부여잡고 있었다. 충북 단양에 사는 조씨는 오전 6시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를 하고 왔단다. 조씨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처음 와본다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의 재종 조카인 안의생씨를 비롯한 후손들이 다가와 조씨의 손을 잡고 “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안 의사 여동생 안성녀씨의 손자인 권혁우씨도 조씨의 손을 잡고 “이제라도 (조씨의 존재를) 알았으니 앞으로 계속 자리에 모시겠다”고 말했다. 조씨는 “같은 경험을 한 이를 처음 만나본다. 가족 아닌 가족을 만난 것 같아 매우 기쁘고 고맙다”고 말했다. 눈시울과 코끝이 빨개진 조씨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보였다. 군포시에서 태어나 청년기까지 보낸 조씨는 스물 세 살이던 1977년, 갑작스러운 대홍수로 어머니를 잃고 집이 떠내려가는 비극을 겪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는 황망함을 견디기 힘들어 조씨는 고향을 떠났다. 10년간 안산, 이천, 서울을 전전하다 서른 세 살 때 비로소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충북 단양에 정착했다. 그동안 독립투사 후손들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다는 게 조씨의 설명이다. ■화장대 안에서 나온 태극기 안, 빼곡한 독립투사 이름 숭모회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조씨는 둘째큰아버지(조응순 선생)의 흔적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그는 “8살 때 형수가 시집을 왔는데 장롱을 해왔다. 이를 설치하기 위해 누나가 원래 있던 화장대를 치웠는데 그 안에서 태극기가 나왔다. 거기에 독립투사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고 밝혔다. 독립투사들이 손가락을 자르고 피로 서명했던 태극기 원본으로 추정된다.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광목 재질로 돼 있어 두툼하고 부드러웠던 기억이다. 누나는 이 태극기를 고이 감춰뒀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이 1977년 안양 대홍수로 떠내려가면서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저희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자료 정보가 많이 있을텐데, 돌아가신지 50년이 넘었다”며 “아버지가 말씀해 주신 것 중 내가 적어놓은 것도 홍수 때 다 떠내려갔다”고 말했다. ■“국가에 대한 헌신, 후손 예우로 보답해나가야” 조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정하철 전 ㈔안중근의사숭모회 상임이사는 “이곳에 단지동맹 단체사진이 있다”며 조씨를 1층 자료실로 이끌었다. 빼곡한 책들 사이 한참 찾던 정 전 상임이사는 “여기 있다”며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이내 조씨를 앉히고 단지 동맹의 사진을 보여주며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조씨는 조응순 선생의 사진을 보며 “나와 닮았냐”고 취재진에게 물으며 미소짓기도 했다. 이번 기념식을 기획한 이주화 안중근의사기념관 학예연구관은 “안중근 의사도 ‘내가 잘 나서 독립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이 일에 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라고 말했다”며 “그들이 빌드업을 했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의 손끝으로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가능했던 거였다. 그러니 그들의 후손을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단순히 내가 누구의 자식, 손자라고 밝히는 차원을 넘어 주변에서 후손들을 챙겨주고 독립투사들의 뜻을 이어주는 게 중요하다”며 “미국에서는 버스에 군인이 타면 시민들이 자리를 양보해준다. 국가와 사회에 헌신·봉사한 것에 대해 보답을 해주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독립유공자의 후손이고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만화 100주년에 맞춰 지난 2009년 개관한 부천 한국만화박물관은 한국 만화의 역사와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한국만화박물관은 만화의 문화, 예술적 가치를 증대시키고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물려주고자 설립됐다. 1층부터 4층까지 약 4만권의 만화가 전시된 국내 최대 규모의 만화 박물관이다. 1층은 만화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만화상영관 그리고 기획전시실이 마련돼 있고, 2층에는 온 가족이 편하게 만화를 볼 수 있는 만화도서관이 자리 잡았다. 3층과 4층은 기획전시와 상설전시가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 만화의 역사가 시대별 흐름에 따라 전시돼 있는 상설전시는 내가 몰랐던 만화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어 눈이 즐거운 공간이다. 200여명의 작가가 실제로 사용했던 펜부터 시작해 K-컬쳐를 이끌고 있는 웹툰의 발전까지 만화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오는 9월 27일까지 진행하는 한국만화박물관의 기획전시 ‘만화로 만나는 힙합’은 만화를 매개로 음악과 영상, 미술로 확장되는 융복합 전시를 통해 힙합이 지닌 역동성과 자유로운 감성을 선사한다. 한국만화박물관 박혜원 매니저는 “전 세대의 마음과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문화가 된 힙합을 만화를 통해 만나보고 미술, 영상, 음악, 의상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힙합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도록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이어 “온 가족이 만화를 즐길 수 있는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어린 관람객들에게는 재미와 즐거움을 어른들에게는 어릴 적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6장: 기라성 같은 연극인들이 울었다. 한국 공연예술의 산실이라 여겨지던 ‘(옛)학전’이 재정난 등으로 운영 33년 만에 폐관(3월)한 데다가, 학전의 대표였던 가수 김민기가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7월)이다. 연극인들은 과거의 일부분이 지워지는 심정이라고 했다. 표면적으론 극단 하나가 문 닫은 거지만, 실질적으론 그 극단을 통해 새롭게 생겨날 수 있었던 연극인과 연극문화가 실종된 셈이다. 그만큼 연극은 어제·오늘·내일의 수많은 문화 요소를 담고 있다. 지역 연극계는 진작 ‘학전 신세’였다. 하지만 큰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연극이 끝나고 홀로 객석에 앉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지키는 지역 연극인들을 비추는 이유는, 그들 안에 지역 정체성이 살아있어서다. ■ part1. 서울에서 대구·부산으로 전파…1980년대 부흥 29일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현재 연극 문화는 1902년 첫 발을 뗀 것으로 전해진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뒤이어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기악, 신라의 처용무 등이 '고대 연극' 기원이라 볼 수 있지만, 지금 흔하게 떠올릴 수 있는 연극 틀은 일제강점기에 신문화가 도입되면서 잡히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일본에서 들여온 부분이 있다 보니 비교적 도심이던 ‘서울’ 중심으로 연극 문화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국내 연극의 르네상스라 여겨진 1950년, 서울 국립극장 개관공연(4월29일) <원술랑>에만 6만여 명의 관객이 모였을 정도다. 하지만 얼마 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립극장은 대구로 이전했고, 전속극단은 부산으로 흩어졌다. 어쩔 수 없던 일이었지만 ‘지역 극단’ 입장에선 초석을 쌓게 된 계기다. 이후 1960년 ‘실험극장’ 창설, 1973년 ‘연극인회관’ 신설 등 알음알음 우리나라만의 연극이 꽃을 피워나갔다. 그리고 1981년 공연법이 개정되면서 비로소 소극장 개설 및 극단 조직이 활성화·자유화 됐다. 이때 메인이 된 지역이 서울의 동숭동과 신촌 일대, 지금의 ‘대학로’다. 여기에서 뻗어나온 가지는 1983년 전국지방연극제로 연결됐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지방 연극 성장 시대’가 열렸다. 더불어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연극의 국제 교류가 이뤄지면서부터는 괄목할 만한 연극계 성장이 이뤄졌다. ■ part2. "지역 연극 소멸은 곧 지역 문화의 말살" ㈔경기도생활문화예술총연합회 대표이사이자 극단 ‘성’의 대표인 김태섭(61)은 지역 연극계의 역사를 몸소 겪어왔다. 1983년 4월 수원에서 창단하고 올해로 만 41년째 운영 중인 ‘성’을 통해서다. 그는 “지역 소극장이 없어진다는 건 지역 문화 자체가 말살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화면이 아닌 현장에서 관객과의 호흡을 생생하게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대상이 지역민이라는 점에서 지역 연극이 가치 있다는 설명이다. 인상 깊은 에피소드로는 1998년 팔달구 방화수류정 인근에서 진행한 공연을 꼽았다. 김 대표는 “방화수류정 수변 위에 무대와 객석을 설치했어요. 저희는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고, 관객들은 연못에 발을 담근 채 옹기종기 공연을 봤죠. 지역 연극만이 할 수 있는 형태의 공연 아니겠어요?”라며 “저는 연극이 삶을 투영한다고 생각해요. 저희 극단의 경우 나혜석·정조대왕·홍사영 등 지역의 인물과 역사를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데, 지역 연극 안에 지역 삶이 투영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요. 그렇게 '성'이 지역 안에서 100년을 가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의 지역 극단 미래는 캄캄하다고도 본다. 나날이 관객들 눈높이는 높아지는데 지역 예술단체들은 '고가의 작품 시장'을 쫓아갈 여력이 안 돼서다. 김 대표는 “문학이나 미술처럼 개인적인 예술 작업은 ‘나의 노력’에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지만 연극은 ‘공동 작업’이라 좀 달라요. 예전엔 연극인들이 본인의 욕심과 사명감으로 지하에서 라면만 끓여 먹고 생활하면서 소극장을 지켜왔는데 이젠 현실적으로 그런 사람이 적죠. 협업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야 작품이 나오는데 이제 그런 환경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 것”이라며 “지역 연극인들이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게 지금의 제가 갖고 있는 책임감이자 소임이라고 생각해요. 지방정부가 나서서 환경을 조성해주지 않는 한 앞으로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전했다. ■ part3.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연극인들은 무너지는 지역 연극, 벼랑 끝에서 힘겹게 버티는 연극인. 지역 문화를 계승하고 지역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지역 연극의 건재를 응원한다. 경기도 외 다른 지역 극단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풀어낸 지역 문화 작품을 소개한다. 최근 폐막한 ‘제42회 대한민국연극제 용인’의 본선 경연 진출작 중 하나인 <프로젝트 이어도-두 개의 섬>은 제주도만의 역사와 색깔이 짙게 담긴 이야기를 다뤘다. 그동안 제주도의 정체성을 담은 작품을 만들어 온 예술공간 오이가 제주도의 과거와 미래를 소재로 이야기를 전했다. 이 안에는 독립군 출신 도하와 미래를 보는 어도가 만나 제주 4·3사건의 비극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특히 제주의 구전민요 ‘이어도사나’를 통해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연결짓는 점에서 지역 문화를 엿보였다. 또 경남 통영의 극단 벅수골이 연극제에 출품한 <하얀 파도>는 통영 바다 냄새를 물씬 풍겼다. 해안가에 있는 가상 공간인 ‘담류마을’이 배경이다. 오염으로 인해 조업이 금지된 담류마을에서 주민들은 재활용이 가능한 해양 쓰레기를 수거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바다에서 쓰레기를 건지던 사람들은 그물에 걸리는 물고기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 당황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통영의 색으로 풀어냈다. 연출을 맡은 장창석 대표는 “우리는 <하얀 파도>를 통해 해양오염의 실태와 삶의 갈등 속에서 바다를 살리고자 하는 은근과 끈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서울 연극의 관점에서 지역 연극은 비주류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소수의 구석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역 연극인들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스스로 특정 시대의 중요한 기록을 남기면서 세대 비전을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9월1일부터 8일까지 용인에서 열리는 ‘제3회 대한민국 시민연극제 용인’에서도 전국 시·도 시민연극단체의 목소리가 더해질 예정이다. 김태섭 극단 성 대표의 인터뷰 내용 일부를 전하며 끝을 맺는다. “이 기사는 연극에만 포커스를 맞춘 기획물 같지만 사실 무용에도, 음악에도 해당되는 전체 예술의 이야기입니다.” <무너지는 지역 연극> 인터랙티브 기사보기 / http://kyeonggimedia.netlify.app ※ 지금까지 보도된 ‘무너지는 지역 연극’ 기사들은 경기일보 홈페이지에서 영상 및 인터랙티브 기사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구급대원들 안 올라올 것 같아…5분 뒤면 진짜 숨 못 쉴 것 같아. 이제 끊어.” 7명이 숨지고 12명이 다친 부천 호텔 화재 참사와 관련, 사고 희생자인 A씨(28·여)의 마지막 전화가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A씨의 어머니는 23일 부천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경기일보와 만나 “딸이 전화로 울면서 남자친구와 같이 호텔에 왔는데 불이 났다고 했다. 근데 ‘나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며 “그때부터 나도 정신이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면서 “전화가 끊긴 이후 사고 현장에서 803호 좀 빨리 도와달라고 외쳤지만 연기가 가득해 진입할 수 없다는 답변만 받았다”고 설명했다. A씨는 전날 오후 7시 42분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화재 사실을 알렸다. 이후 7시 57분에 다시 전화해 마지막 음성을 남긴 채 화재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A씨의 어머니는 “처음 구급차가 왔을 때는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했었다”며 “그런데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사망했다고 병원 관계자들이 말해줬다. 심폐소생술은 예의상 했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의 휴대전화도 아직 받지 못해 친구들이 소식을 모른다”며 “우리 딸 가는 길에 한 명이라도 오면 외롭지 않을 텐데, (딸이) 가는 길을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한편, 부천 화재 사고와 관련 경찰과 소방당국은 8월 23일 오전 11시부터 낮 12시 30분까지 사고 현장에서 합동 감식을 벌였다. 합동 감식을 마친 오석봉 경기남부경찰청 과학수사대장은 “화재 장소로 확인된 8층을 비롯해 화재 발생 이후 총 19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정확한 원인 규명에 집중했다”고 전했다.
“희뿌연 연기와 함께 비명소리도 들리고 깜짝 놀랐죠.” 23일 오전 11시께 부천시 원미구 중동의 한 호텔. 호텔 입구 앞엔 현장 감식을 위한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고, 그 사이로 소방, 경찰관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화재 최초 발원지로 파악된 호텔 810호의 창문은 깨져 있었고, 유리 파편 일부가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호텔 8층 외벽엔 검게 그을린 자국과 노랗게 변색된 자국이 있었다. 인근 시민들은 멀찍이 떨어져 입을 막은 채 걱정스러운 눈길로 호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밤 화재 현장을 직접 목격한 뒤,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침부터 현장에 와봤다는 인근 주민 김형근씨(62)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뛰어내리니, 마니 하는 소리가 들려 가봤다”며 “에어매트가 펼쳐지고 옆 호텔 건물에서 손님들이 다급히 뛰쳐나오는 등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에어매트로 뛰는 장면을 멀리서 목격했다는 또 다른 주민 신모씨(30대)는 “길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호텔에선 불이나고 있었고 8층에서 매트 위로 뛰어내리는 아찔한 모습을 봤다”며 “뉴스로 사망자가 있었다는 소식을 알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현장에 와봤다”고 말했다. 이날 낮까지 화재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지난밤 10시께 불길이 완전히 잡혔지만, 소방대원과 경찰관들은 합동 감식을 위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소방 당국은 이날 오전 11시부터 합동 현장 감식을 진행했다. 감식에는 경기도소방재난본부 화재조사팀을 비롯해 경기남부경찰청 과학수사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 관계자 30여명이 투입됐다. 안전모와 방독면을 착용한 조사관들은 과학수사 장비와 카메라 등을 챙겨 줄지어 호텔 건물로 진입했다. 감식팀은 최초 발화점으로 유력한 호텔 810호 객실을 중심으로 사상자들이 발견된 계단과 복도 등 건물 안팎을 면밀히 조사할 방침이다. 한편 이 불로 투숙객 7명이 숨지고 중상자 3명 등 12명이 다친 것으로 확인됐다.
"작품 속 신선한 색감과 캐릭터들을 통해 유쾌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어요" 리하킴 작가의 ‘마이 세이프티 월드’ 초대 개인전이 구리 아치울마을에 있는 갤러리 카페비니 4층에서 진행 중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주로 캔버스 아크릴릭 작업을 베이스로 진행하고, 렌티큘러, 터프팅 작업등을 이용한 안전모 캐릭터들을 표현했으며, 작품 속 귀엽고 잔망스러운 캐릭터들은 자신의 여러 갈래의 마음에서 분신처럼 발현된 객체를 의미한다. 행동으로 실천된 우리의 생각들과 우리가 지나쳤던 생각들이 일부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마음속에 남아서 안전모를 쓴 분신과 캐릭터가 되어 내적 상상의 공간에 생명력을 얻어 돌아다닌다. 또한 리하킴 작가는 안전모를 쓴 친구들과 함께 다양한 화면 속에서 신명 나게 뛰어다닌다 생각하며 이번 전시에 임하고 있다. 형광색 느낌이 나는 파스텔 색조를 주로 사용해 캔버스 작업의 대부분은 블루라이트에 반응하여 일반 이미지, 형광 이미지 2개의 색감으로 나올 수 있도록 작업했다. 이번 착한상상전을 기획한 최철 PD(사단법인 서포터즈이룸 이사장)는 "리 작가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색감의 신선한 생명력과 그 안의 인물들을 통해 유쾌한 해방감을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 전시는 10월 20일까지 대안 문화공간 '카페비니 아치울점'에서 무료로 진행된다.
문 닫는 공연장, 소멸하는 극단, 텅 빈 객석. 연극계가 흔들린다. 연기·조명·의상 등 각종 예술장르의 총망라였는데 이젠 ‘연극’ 자체가 리미티드 런(limited run·기간 한정공연)이다. 경기도 연극판은 어떨까. ‘대학로’와 가깝지만 ‘공연메카’는 아닌 이곳에서 경기도 연극인들은 어떤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나. 지역 연극을 통해 문화예술계의 현실과 이상을 살펴봤다. 편집자주 인터뷰 줌-in 연출가 겸 배우 극단 허리 대표 유준식 “고향 그린 연극… 내 꿈이고 고집이었다” #1장: 어둠이 내린 소공연장. 검은 커튼이 양옆으로 펼쳐지면 비로소 공연의 막이 열린다. 웅성거리던 객석의 숨을 멈춰 세우고 한 남성이 고요히 무대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무채색 옷을 입은 연출가 겸 배우, 극단 허리 대표인 유준식(63·의정부)이다. "지역 연극계 어때요?" 묻자 준식은 "대학로는 청과물시장, 지역은 과수원"이라고 답했다. 많은 사람에게 되도록 비싼 값에 잘 팔려는 '시장', 그리고 판매의 본질이 되는 좋은 상품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밭' 정도의 차이가 있단다. 시장 중심 사회에서 농사는 소홀해졌다는 게 그의 독백이다. 상업도, 비상업도 무엇 하나 잘못된 건 없다. 다만 그는 "본질에 대한 깊이 추구가 지역 예술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라고 덧붙였다. 경기도 연극 현장은 과연 '지역' 연극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까. 짧은 상념에 빠진 준식은 10여초 후 천천히 입을 뗐다. "이를테면 대구에 지역 연극이 있어요. 부산 연극, 창원 연극, 진도 연극도 있고요. 그런데 경기 연극은 참 이상해요. 제가 애써 '의정부 연극'이라 표현한다 해도 그 단어가 웃기게 들려요. 과연 경기 연극과 대학로 연극의 변별력이 얼마나 있느냐는 거죠. 오히려 수도권과 멀수록 '지역 연극'은 잘 돼요. 경기도는 서울 문화에 가까우니까 '우리 고장의 예술판'이 형성되기 힘들거든요. 의정부 사람들이 여기서 연극 보겠어요? 40분만 나가면 서울인데." 준식은 잠시 멈추더니 이내 힘을 실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의정부 연극'이라는 고집을 부리는 거죠.” 1962년, 그가 태어났을 때 '이 땅'은 산골마을이었다. 의정부시 최동단에 위치해 한자로도 '산곡(山谷)동'이라 쓴다. 학교를 가기 위해 정류장까지 가는 길만 걸어서 30분. 그런데 그 정류장이 기지촌 가까이에 있었다고 한다. "주한미군의 행패를 무섭도록 실감나게 봐왔어요. 마을 할머니들도 미군만 보이면 다 도망가 빗장을 걸어 잠굴 정도였죠. 매일 헬기·장갑차 훈련 소음에 시달리는데, 예민한 청소년기에 얼마나 충격이었겠어요. 근데 학교를 가면 주한미군은 우리의 '우방'이래요. 현실과 교육 사이의 괴리감이 있었죠. 서울을 지켜주며 피해를 감수하는 지역, 분단을 강화하는 중심 도시. 그게 의정부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그걸 연극으로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분단’, 그리고 ‘고향’의 이야기를 예술로 풀고 싶던 준식, 그게 경기도 연극계에 몸담게 된 이유이자 명분이었다. 문학·미술·음악·무용의 총체적 형태인 이 '밭'에서 가족과 '농사'를 꾸린 세월만 30년이 훌쩍 넘었다. 그의 곁에는 연극기획자인 아내, 배우인 딸, 음악가인 아들이 함께한다. 대표적인 작품은 <만남>(1996년作)과 <환향>(2010년作)이다. 시골에서 순박하게 살고 있는 아이들을 이웃이 괴롭히는 내용, ‘환향년’ 등으로 불리우며 수모를 겪는 이들의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분단 상황을 상징화하고, 의순공주 묘역 등을 담으며 지역색을 잔뜩 묻혔다. "정치권력으로 풀어내면 ‘폭력’, 경제 논리로 풀어내면 ‘고용’, 감동의 힘으로 풀어내면 ‘문화’ 아니겠습니까. 저는 문화를 선택했죠. 지역 연극이 곧 기초예술이기 때문에, 그 뿌리가 단단해야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로 중앙예술이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대학로건 어디건 예술 활동은 이어져야 하니까 저는 경기도 소극장에서 연극을 하는 겁니다." 깊이 있는 지역만의 이야기를 문화로 승화하기 위해, 경기도 연극무대에 남아 있다는 그였다.
"후원을 받게 된다면 다른 선수들한테도 큰 귀감이 될 겁니다" 한국 선수들의 영상을 보며 독학으로 양궁을 수련해 올림픽에 출전한 아프리카 차드의 '마다예' 선수가 경기도 내 양궁 장비 제조기업인 파이빅스의 후원을 받게 됐다. 2024 파리올림픽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전 종목을 석권한 대한민국 양궁 대표팀 선수들의 활약 못지 않게 큰 화제를 모았던 마다예 선수. 마다예는 양궁 남자 개인전 64강 김우진 선수와의 대결에서 1점을 맞혀 올림픽에서는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했다. 이후 아프리카 최빈국 중 하나인 차드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한국 선수들의 영상을 보며 훈련한 사연 등이 알려졌고, 마다예의 SNS에는 한국인들의 응원이 쏟아졌다. 이 소식을 접한 백종대 파이빅스 대표는 지난 8월 4일(현지시각) 마다예 선수를 직접 만나 활과 액세서리 등 훈련에 필요한 물품 일부를 후원해 주기로 약속했고, 8월 5일 후원 계약을 맺었다. 백 대표는 "나도 양궁선수 출신으로 한국에 큰 감동을 선사한 마다예 선수를 응원하고 싶었다"며 "4년 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까지 같이 성장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마다예 선수는 "차드의 다른 선수들에게도 크게 귀감이 될 것"이라며 백 대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작품을 보면 어른이 되면서 겪어야만 하는 순간들이 떠올라 위로를 받게 돼요" 박보선 작가 ‘모자이크 모멘트’ 초대 개인전이 구리시 아치울마을에 위치한 갤러리 카페비니 4층에서 진행 중이다. 박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현대인의 내면에 자리한 고독함을 표현하고자 한다. 젊은 인생에서 느낀 삶의 허무함과 인간관계에서의 회의감을 담아, 텅 빈 인간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지워진 부분은 모자이크 패턴으로 표현된다. 이는 추상적인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선택한 소재이며,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레이어'에서 빌려 온 요소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감정이라고 생각하기에, 특정한 인물의 모습이 아닌 빈칸으로서 보는 이 스스로 투영할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번 착한상상전을 기획한 최철 PD(사단법인 서포터즈이룸 이사장)는 "박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을 보면 우리 개개인이 어른이 되기 위해 겪는 꼭 필요한 시간들을 기억해 내고 위로받는 신비로운 순간을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 전시는 8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구리시 아치울길 17 카페비니 4층에서 무료로 진행된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다.
함께 지켜야 할 아이들, 막을 수 있는 아동학대 ① 잃어버린… 잊어버린 아이들 한 아이의 탄생은 언제나 경이롭다. 온 가족의 따뜻한 시선 속에, 살뜰한 보살핌 속에 성장하며 우리의 미래가 되는 아이들. 그러나 마냥 찬란해야 할 시기, 아이들에게 닥친 어둠이 있다. 한 아이의 인생을, 결국 우리의 미래를 망쳐버리는 그것, ‘아동학대’다. 그 불행한 어둠은 우리의 무관심을 자양분으로 번져간다. 우리의 관심은 그들의 어둠에 한줄기 빛이 될 수 있다. 당신의 관심이, 우리의 변화가 막을 수 있는 아동학대. 경기일보가 그 길을 제시한다. 편집자주 장마로 연일 장대비가 쏟아지던 지난 7월29일 양평군의 한 납골당.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인 듯 활짝 웃는 아이의 묘역이 우리를 맞이했다. 472일. 16개월 남짓을 살다 간 아이. 마지막 순간 뱃속은 파열된 장기 때문에 온통 피로 가득 찼고, 갈비뼈 곳곳은 부러졌으며, 췌장은 절단됐던. 울음 한번 쏟아내지 못할 고통 속에 스러져간 아이. ‘정인’. ‘정인이’로 불리던 이 아이의 이름은 우리 가슴 한 켠에 아픔으로 남아있다. 아이의 고통이 언론을 통해, 수사 결과를 통해 밝혀질 때마다 온 국민이 내 일인 것처럼 분노했으며 눈물을 쏟았다. 270만명이 넘는 국민들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으로 몰려가 정인이를 죽음으로 내몬 양부모를 강력하게 처벌해달라며 마음을 더했다. 온라인에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손으로 직접 쓴 ‘정인아, 미안해’라는 글귀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올리는 캠페인까지 벌어졌다. 검찰이 정인의 양모에게 살인죄가 아닌 아동학대치사죄를 적용하자 검찰청 앞은 항의성 조화 행렬이 들어섰고, 생면부지 아이의 죽음을 추모하겠다며 가족끼리, 교복을 입은 친구끼리, 흰머리가 가득한 노년의 몸으로 양평의 추모공원을 찾았었다. 밤낮없이 이어진 추모행렬은 법도 바꿨다. 세 번이나 아동학대 의심 신고가 있었음에도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분노에서 출발한 움직임은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의 신고시 수사기관이 반드시 수사를 하도록 법을 바꿨다. 법정형 역시 강화됐다. 정인이 양모에게는 당초 적용된 아동학대치사 혐의가 아닌 살인 혐의가 인정돼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렇게 4년. 다시 7월29일. 사람들의 관심은 사라졌고, 정인이는 또 홀로 남았다. 세상에 숱한 정인이가 생겨났으며, 그들의 아픔은 ‘반짝 관심’의 대상이 됐다. 이곳 납골당 역시 한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듯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납골당 관계자는 전국, 전 세계인들이 추모를 위해 찾아오던 과거와 달리 더 이상 정인이를 찾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정인이 묘역에서 불과 10분 남짓 떨어진 ‘정인이 추모갤러리’. 전국 각지에서 정인을 기리며 보내오던 선물을 감당할 수 없어, 정인이와 같은 아이가 다시 태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서, 그렇게 만들어졌던 이곳은 폐허로 변해있었다. 출입문은 두꺼운 나무 판자에 막혀 있었고, 창문은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게 가림막이 설치돼 있었다. 추모갤러리 주변으로는 성인 남성의 다리 길이 만큼 자란 풀이 스산한 기운까지 뿜어냈다. 우리가 정인을 잊어버린 동안 양모는 상고심 끝에 무기징역이 아닌 징역 35년의 감형된 형량을 확정받았다. 정인이 이전엔 원영이… 끝없는 학대, 비극 되풀이 정인이보다 더 오래전 우리가 잊어 버린 아이가 있다. 학교에 가야 할 나이에 차디찬 욕실에 갇혀 계모가 부은 락스와 찬물을 온 몸으로 맞으며 홀로 공포 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아이. 숨진 뒤에도 일주일간 방치돼 있다가 야산에 묻혀야 했던 아이. 매일 굶기는 부모 때문에 음식을 보면 허겁지겁 먹기 바빴던 아이. 지역아동센터까지 개입했지만 누구도 마지막까지 아이의 안전을 지키지 못했던, 2016년 우리의 무관심으로 떠나보낸 아이. ‘원영이’. 키 112.5㎝, 몸무게 15.3㎏. 일곱 살 아이라고 믿기 어려운 상태로 발견됐던 아이의 유골함이 있는 평택의 한 납골당에는 장난스러운 표정의 원영이 사진 세 장만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원영이가 사망 전 수개월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 소식에 손수 준비해온 음식을 차리던 사람들. 전국 각지에서 보낸 선물이 가득하던 이곳에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진 건 1년 만인 2017년께다. 원영이의 잔혹했던 죽음을 잊은 우리에게 4년 뒤 정인이의 잔혹한 죽음이란 결과가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4년, 우리 주변의 아동학대는 사라졌을까. ■ 경기도내 아동학대 범죄 해마다 증가... 7년간 4배↑ 원영이의 죽음이 흐릿해지기 시작한 지난 2017년부터 7년간 경기도내 아동학대 범죄는 해마다 증가했다. 5일 경기남·북부경찰청에 따르면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경기도내 아동학대 검거 건수는 총 1만6천832건에 달했다. 이는 해마다 드러나는 아동학대만 평균 2천400건에 달한다는 얘기다. 연도별로 보면 원영이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인 2017년 도내 아동학대 범죄 검거 건수는 988건, 2018년 1천175건, 2019년 1천484건, 2020년 1천671건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흐름은 정인이 사건 이후에도 유지됐다. 2021년 3천627건이던 아동학대 검거 건수는 2022년 3천696건, 2023년 4천191건으로 늘었다. 7년간 아동학대 범죄 검거 건수가 4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학대로 세상을 떠난 아동도 매년 증가했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제2의 원영이와 정인이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통계청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도내에서 학대로 사망한 아동은 2018년 5명, 2019년 7명, 2020년 11명, 2021년 12명, 2022년 16명에 달한다. ■ 특정 사건 때만 반짝 제도 변화... ‘아동학대’ 여전 2016년 원영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같은 해 4월12일 ‘유치원·어린이집 아동학대 조기 발견 및 관리·대응 매뉴얼’을 제작해 전국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배포했다. 매뉴얼에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평상시 매일 아동의 건강과 안전을 확인해 평소와 다른 경우 보호자에게 문의해 확인해야 하고, 아동학대 징후가 발견되거나 의심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해야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특히 아동이 이틀 이상 무단결석 시 전화나 가정방문을 하고, 소재가 확인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원영이는 유치원에 다닌 적이 있고 한 달간 무단결석을 하고 퇴학 처리됐지만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9월 포천시의 한 자택에서 양부모가 6세 딸을 17시간 동안 투명테이프로 묶어 놓고 폭행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식탐이 많다’는 게 양부모가 밝힌 학대 사유다.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이어지자 정부는 2017년부터 취학대상 아동에 대한 전수조사를 도입했다. 필요할 경우 경찰에 수사를 의뢰할 수 있는 길도 열었다. 이와 함께 2019년에는 처음으로 만 3세 아동을 전수조사했다. 아이의 안전을 확인한다는 취지다. 그러나 1년 뒤 이번엔 정인이 사건이 터졌다. 정인이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지만, 어린이집 교사의 아동학대 의심 신고도 정인이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경찰이 학대에 대해 무혐의로 판단하며 수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영이의 죽음을 계기로 등장한 매뉴얼의 무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정부는 이른바 ‘정인이법’으로 불리는 ‘아동학대 처벌 특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아동학대 살해죄를 신설, 아동을 학대하고 살해한 경우 사형이나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는 내용과 아동학대 신고가 접수되는 즉시 경찰이 수사에 착수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러나 2021년 5월 화성시에서 양부가 2세 딸을 폭행해 살해한 사건, 제2의 정인이라 불리던 ‘민영이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고 국민적 관심은 오히려 과거 사례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게 무관심 속에 ‘매년 아동학대 증가’라는 결과가 나타났다. ■ “법 개정만으로 한계... 국민 관심 줄면 학대 반복” 매번 공분을 일으킨 아동학대 사건이 생기면 각종 단체가 앞장서 시민들의 분노를, 제도의 변화를 외쳤다. 그들이 외친 문제들은, 국민들의 지지 속에 정책을 만들었고 법을 바꿨다. 그러나 법이 바뀐 뒤에도 아동학대를 막진 못했다. 국민의 관심이 사라지면서 변화된 제도나 법이 제대로 정착하는지, 이들 제도나 법이 실질적인 대안인지를 꾸준히 검증하고 지켜보는 시선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2013년부터 아동학대 관련 가해자의 처벌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져 정인이 사건 당시에도 일선에서 활동했던 ‘천사들의 둥지’ 관계자는 여론을 의식해 내놓는 대책들이 성급한 정책은 아닌지, 적합한 대안인지를 지켜보는 꾸준한 관심이 없는 한 바뀐 법과 제도들은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정부가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과 제도가 오히려 아동을 보호하지 못하고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며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만든 성급한 정책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동이 안전한 사회를 위해 정부가 진정성 있는 정책을 만들게 하려면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원영이 사건 당시 맘카페를 운영하며 추모 공간을 만든 류정화 평택시의원 역시 “원영이의 추모 공간도 사라지고 사람들의 관심도 줄어들며 원영이 사건이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아동학대를 예방하기 위해 사각지대에 있는 아동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현재는 사라졌지만 당시 1인 시위 등을 주도한 시민단체 ‘정인이를 찾는 사람들’ 관계자 역시 같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 반짝 했던 관심이 점점 식어가면서 정부 역시 이들 단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더 이상 단체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지금은 단체 자체가 사라지게 됐다는 얘기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동학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떨어졌고, 처벌 강화나 제도 개선 등에 대한 목소리도 사건 발생 당시에만 냈었다”며 “여전히 아동학대는 발생하고 있고, 정인이 사건 같은 일이 앞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고 전제했다. 이어 “정부가 실질적으로 아동학대를 예방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게 하려면 국민들이 꾸준히 아동학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α팀 ※ 경기α팀: 경기알파팀은 그리스 문자의 처음을 나타내는 알파의 뜻처럼 최전방에서 이슈 속에 담긴 첫 번째 이야기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