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빛낸 정우성

[학생 칼럼] 진보와 보수에 관하여

대한민국의 정치는 크게 진보와 보수라는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두 세력 간의 팽팽한 대립 사이에서 발전해왔다. 그러나 두 세력 간의 대립이 갈수록 심화돼 국회, 집회 등에서 각종 폭력적인 형태의 대립이 벌어졌고 국민들도 두 세력으로 분열, 대립하게 됐다. 최근 국회에서 패스트 트랙 안건 발의로 인해 벌어진 대립과 청와대 사이트에 올라온 특정 정당 해산 청원과 관련된 발언들은 두 세력 간의 양극화의 심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고 비판하고 더 나아가 혐오하는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는 앞으로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현 시점에서 필자는 심각해진 두 세력 간의 대립을 완화시킬 수 있는 요소들 중 가장 효과적인 요소가 언론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정치체제로 일컬어지는 삼권분립의 세 정치기관마저 현재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으로 분열돼 있는 상태에서 두 세력 간의 갈등의 완화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요소는 언론이다. 물론 현재의 언론 역시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으로 갈라져 국민들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소라는 것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두 진영의 언론들이 서로의 의견을 이해하고 적절한 비판과 수용을 통해 양측의 의견을 확실하게 전달한다면 국민들 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고 서로의 의견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언론을 필자가 제시한 언론의 형태로 개혁하기 위해선 국민들의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즉,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국민들이 한 쪽으로 편향된 시각을 갖지 않고 상황에 맞는 융통성 있는 사고로 언론에서 보도된 잘못되거나 편향적인 기사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언론 역시 자신들의 모습을 자각하게 될 것이고 진정한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과열돼 있다. 모두가 자신들과 한편인 자들을 옹호하고 반대쪽의 의견을 비난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평화와 중립이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반대로 무조건적인 대립 또한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양측 모두 적절한 대립과 수용으로 개인과 단체의 이익만이 아닌 모두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이민준 남양주 와부고 1

[학생 칼럼] 남과 북,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통일에 대해선 우리 역사적으로 많은 아픔과 슬픔이 있고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는데, 최근 정권 교체와 이로 인해 대북 정책이 활발해지면서 이에 따라 찬성과 반대에 의견이 나오면서 많이 언급되고 대두되고 있다. 우선, 통일이란 지리적, 정치적으로 분리돼 있는 남과 북이 국토와 겨레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어느 한 부분만 합쳐지는 것이 통일이 아니라, 두 부분 모두 충족해야만 통일이라고 볼 수 있다. 통일에 대해서는 크게 통일을 찬성하는 찬성 입장과 반대하는 반대 입장이 존재한다. 반대 입장으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통일 비용에 대해서 많이들 말한다. 여기서 통일 비용이란 남북이 통일하는데 들어가는 재정적인 모든 비용을 말한다. 통일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도 많이 언급된다. 소득격차로 인한 위화감 조성, 남북한 간의 문화적 이질감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갈등, 옛 북한체제를 동경하는 사람들의 소요사태, 또한 통일 이후에 2차적인 분단문제에 대해 우려하는 의견도 있다. 2차적인 분단이란 통일 이후에 또 다른 문제와 갈등으로 인해 한번 더 우리 민족이 분리되는 현상을 한다. 찬성 입장으로는 역시나 대표적인 의견이 분단 비용이다. 반대 의견에 통일 비용의 부담이라는 의견이 있다면, 찬성 측에서는 분단 비용의 문제를 든다. 분단 비용이란 통일 비용과 비슷한 의미로, 분단으로 인해서 지출되는 국방비나 치안 유지비 등을 말한다. 찬성 측은 이러한 분단비용은 통일이 되지 않는 한 영구적으로 지출되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통일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많이 들어가지만, 분단 이후 지금까지의 분단 비용에 더해서 앞으로의 지출된 비용까지 생각했을 때 통일 비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다. 또한 남북이 통일되면 자원과 추진력을 활용해 개발적인 부분에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렇듯 대표적인 찬반의견을 비교해 보면 찬성 의견에는 주로 장기적인 관점이고 반대 의견은 지금 당장의 현실적인 상황과 주어진 국민의 상황을 중시하는 단기적 관점이다. 통일을 해야 된다 하지 말아야 한다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통일의 필요성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어떠한 방식으로 통일해 나아갈 것인지 또 통일이 이후에 정책적인 부분이나 문제상황의 해결은 어떤 식으로 해결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한 부분이다. 통일의 찬반의견이 대립되고 있는 가운데 서로의 의견만을 맞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견을 포용하고 조금 더 큰 것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고,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며 함께 고민하면서 협력해야 될 때이다. 배성영 성남 성일고 3

[항일독립운동 학교 유적지를 찾아서] 9. 광명 온신초등학교

2019년은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또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시작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 제1조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적혀 있다. 대한민국은 이처럼 민주와 공화라는 바탕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초가 된 것이 31 운동이고, 그 기틀이 된 곳이 바로 경기도라 할 수 있다. 광명에 자리 잡고 있는 온신초등학교에는 3ㆍ1 독립만세운동 광명지역 발상지 기념비가 교내에 있다. 이 기념비가 있는 온신초등학교는 광명지역 3ㆍ1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앞면에는 3ㆍ1 독립만세 광명지역 발상지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당시에 일어났던 일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온신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터는 원래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였다가 1934년 4월 1일에 서면공립보통학교 부설 간이학교가 들어서게 되면서 학교부지가 됐다. 1947년에 현재의 이름인 온신국민학교로 정식 개교했다. 1919년 3월 27일 농민 이정석은 노온사리 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선동하고 1인 시위를 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에 다음 날 아침 일본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치안법 위반죄로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에 구금됐다. 이 소식을 들은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은 휴교령으로 집에 내려와 있던 배재고보생 최호천에게 자신의 아들을 구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호천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윤의병과 만나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고, 마을 주민들을 모았다. 윤의병과 최호천과 함께 주민 70여 명이 면사무소 부근에서 이정석을 구출할 것을 결의하고 인근 가리대마을에서 100여 명이 합세해 200여 명의 인원이 모였는데, 이때 최호천, 윤의병, 이종원과 함께 농민 김거봉, 최정성, 유지호, 최주환이 앞장서서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로 향했다. 주재소로 향하는 도중에 최호천은 곤봉이나 돌로 주민들에게 무장하도록 했고, 밤 10시경 구름산을 넘어 주재소에 가서 뭉둥이로 주재소를 부수고, 돌을 던졌다. 주재소에 있던 경찰과 담판을 해 이정석을 석방하려고 했으나 이미 이정석은 영등포 본서로 넘어갔음을 알고 다음날 본서에 가는 일본인 경찰에게 이정석의 신병 취하를 약속받았다. 이때 이종원은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으니 각서를 써 달라고 했고, 일본경찰은 관리인데 약속을 어기겠느냐면서 틀림없이 풀어주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에 시위대는 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돌아와 소하리 보통학교 뒤편에서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그러나 이정석을 풀어주기는커녕 다음날 경찰 병력을 동원해 최호천, 윤의병, 이종원, 유지호, 최정성, 기거봉, 최주환을 체포하고 구속했다. 최호천은 1919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으나 중간에 소요죄로 바뀌어 결국 1921년에 징역 2년으로 확정됐다. 1심은 궐석재판으로 진행된 걸로 보아 식민지 법정의 재판에 계속 항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의병은 당초 소요죄로 징역 1년 판결을 받았으나 고등법원에서 파기돼 대구와 평양복심법원을 거쳐 징역 2년으로 확정 판결받았다.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과 최정성은 중한구금자 탈취미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해 1919년 12월 벌금 30원으로 확정됐다. 이외에 유지호, 김인한, 최주환 등은 중한구금자 탈취미수죄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정석은 체포 이후 재판 기록이나 여타 기록이 없다. 3ㆍ1 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룬 7인 중 최호천, 윤의병, 유지호, 최주환은 1990년 애족장을, 이종원은 1992년 대통령 표창을, 김거봉은 201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1919년 광명에서 시작된 대한독립만세는 바로 독립운동의 처음과 끝은 이 나라의 통합을 부르짓는 것이며, 민주공화국으로서의 첫걸음이었다. 31 운동에 참여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뜻을 잊지 않고, 다시 시작될 대한민국의 100년을 기약해 본다. 윤용한 화성 고정초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