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시그널' 시즌2 송다은+'역류' 김해인, 월드컵 응원 여신 변신

채널A '하트시그널' 시즌2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배우 송다은과 지난 4월 종영한 MBC 드라마 '역류'의 여주인공 김해인이 월드컵 응원 여신으로 깜짝 변신했다.두 사람은 모두 이안이엔티 소속이자 축구 팬이라는 공통분모로,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참여한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전을 응원하기 위해 월드컵을 테마로 한 화보 및 응원 영상 촬영에 응했다.이번 프로젝트는 디지털매거진 지오아미코리아(GIOAMI KOREA)가 기획했으며, 송다은 김해인은 대한민국 축구팀을 응원한다는 좋은 취지에 기꺼이 응해 '붉은 악마'로 변신했다.14일 개막식에 맞춰 공개된 응원 영상에서 두 사람은 러시아 월드컵을 빛낼 선수로 각자 한명씩을 꼽았다. 송다은은 "베로나에서 뛰고 있는 이승우 선수가 꼭 골을 넣어주길 바란다. 막내인 만큼 팀에 기운을 팍팍 불어넣어줬으면 좋겠다"라며 웃었다.김해인은 "손흥민 선수가 맹활약해준다면 16강도 가지 않을까? 모든 선수들이 협력해 최선을 다해 좋은 경기를 만들어주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바란다"고 말했다.두 사람의 응원 영상 및 월드컵 응원룩 화보는 14일부터 지오아미코리아 네이버TV 채널, 공식 페이스북, 유니콘TV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순차적으로 공개됐다.장영준 기자

[6·13 국민의 선택_그는 누구인가] 진보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당선인

300만 인천시민은 1,2대 직선 교육감이 연이어 비위에 연루돼 위기에 빠진 인천교육을 구할 새로운 수장으로 진보진영 단일후보 도성훈 인천시 교육감 당선인을 선택했다.도성훈 당선인은 1985년 2월 인천 성헌고등학교에서 재단의 파행적 학교 운영과 비리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첫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전교조 설립에 주도적이었던 그는 1천500여명의 대량 해고사태를 피하지 못했다.그가 다시 교편을 잡은 것은 1994년 3월, 해직된 지 4년 6개월 만이었다. 해직교사로 교육민주화를 외치며 현실적 어려움을 겪던 그가 교단에 다시 서게 된 것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있는 혁신학교를 선사하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 400년 된 느티나무를 벗 삼았던 석천리 꿈많은 소년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당선인(58)은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버스도 다니지 않던 산 중턱 산골마을이었다. 천안에 가려면 3시간 동안 산길을 걸어야 하는 ‘산골 소년’이었다.사찰과 사당 등을 짓는 대목(大木) 할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에서 살던 그는 궁핍한 산골에서 벗어나 강원도 철암 공장으로 향하던 부모님의 손을 떠나 조부모에게 맡겨졌다. 그의 고향 입구에는 400년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어른 양팔로 세 번을 둘러야 할 정도로 큰 나무는 그에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곳이었다가, 미래의 꿈과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을 키우는 희망의 공간이기도 했다. 봄이면 산에 올라 친구들과 함께 진달래를 따 먹고, 달래와 냉이, 다래, 으름, 머루, 칡뿌리로 간식을 대신했지만, 조부모가 아낌없이 준 사랑 덕에 삶에 가장 큰 자양분을 얻었다. ■ 부모님에게 교사의 덕목을 배우다 10년 만에 함께 살게 된 부모님은 한없이 자애롭던 조부모와 달리 그를 엄격하게 대했다. 어리광만 부리며 살았던 철부지에게 어머니는 아들이 잘못될까 우려돼 회초리로 매섭게 야단을 치곤 했다. 반면 아버지는 교육문제는 어머니에게 일임하고 그를 묵묵히 바라보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 어머니의 엄격함, 아버지의 신뢰는 그가 교사로서 살아가는 내내 가슴에 간직한 덕목이 됐다.80년대 초반 민주화 요구 집회와 시위 속에도 대학생활 낭만에 빠져 베이스기타를 잡았던 그는 시골훈장으로부터 한학을 배워 자신에게 가르쳐주며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전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스승의 보람을 느끼고,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교직을 이수해 교사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 첫 부임 학교서 사학재단 비리에 맞서다 1985년 2월, 대학 졸업 한 달 뒤 사립학교인 인천 성헌고 교사로 부임했던 그는 재단 이사장 부인이 교장으로 있던 이곳에서 처음 사학재단 비리와 맞섰다. 1987년 새로운 학교재단이 들어선 뒤 부족한 교사를 임시 강사 채용으로 대체하는 등 이상한 일이 이어졌다.결국 그는 동료교사 8명과 함께 1988년 1월 유성으로 떠난 여행에서 처음 서로 문제에 공감하고 공동 기구를 만들기로 했다. 1988년 8월 23일 하나 둘 뜻을 함께했던 교사 23명이 평교사협의회를 공식 발족했고, 그는 초대 회장이 됐다. 첫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이후 작은 사건이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결국 그는 교사협의회 결성을 사유로 해임됐고, 청문회를 통해 교사 임용 비리 등 학교 전횡이 폭로되고, 교사와 학생, 학부모 100여명이 학교로 몰려오면서 다시 복직할 수 있었다. ■ 4년 6개월, 해직교사의 삶이 시작되다 성헌고 민주화 투쟁이 마무리될 무렵 전국 교사협의회가 교원노조건설특별위원회를 발족하면서 전교조 결성이 본격추진됐다. 그 역시 전교조 결성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989년 6월 10일 전교조 인천지부도 800여명의 교사들과 함께 결성식을 열고 정식 출범했다. 그는 학교민주화를 주도하고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1989년 8월 1일자로 직권면직 조치됐다. 1천500여명의 대량해고 사태에 항의하며 전국 해직교사들과 명동성당 단식농성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다.그곳에서 뜻을 같이하는 고교 동창 5명을 만났다. 부평고 출신 해직교사만 6명, 힘든 단식에도 그가 교육민주화를 포기하지 않도록 한 힘이었다. 4년 6개월 해직교사 시절, 그의 부인 김인숙씨는 묵묵히 남편 곁을 지키며 가정을 책임졌다. 명절에도 빈 손으로 고향집을 찾아야 했고, 어머니 생신에는 빈손으로 갔다가 아들의 어려움이 마음 쓰여 사준 점퍼를 입고 돌아오며 그는 참 많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 다시 돌아온 학교, 멈출 수 없었던 교육민주화 1992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해직교사들의 원상복귀에 매달린 그는 1994년 3월 신규 특별채용 형식으로 관교중학교에 부임했다. 여전히 전교조는 불법이었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았다. 그는 선생이야말로 평생을 해볼 만한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 원하는 내용의 복직이 아니었지만 받아들였다.전국 최초 여자공업고등학교인 인천여자 공고에서 일하던 1999년, 드디어 전교조는 합법노조가 됐다. 1년 6개월여를 전임자인 사무처장으로 일하던 그는 2001년 다시 교사로 복직했다. 그리고 2002년, 인천지부장선거에서 11대 인천지부장에 당선됐다. 이후 12대 지부장까지 연임하며 교육개방, 교육행정정보시스템(네이스) 도입, 학교급식 지원조례 등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면 언제나 제일 앞에 그가 있었다. ■ 행복한 교육 만들기에 나서다 부개고등학교에 부임한 그는 인천 참교육장학재단을 설립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반찬가게, 정육점, 국수집을 운영하는 각계각층 시민 400여명이 참여해 십시일반 장학금을 모았다. 그리고 옮겨간 동인천고에서는 인문계 고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고민했다. 인문계 고교를 활력이 넘치는 중심으로 세우기 위해서는 다양한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는 2016년 행복배움학교(인천형 혁신학교)인 동암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학교 혁신을 이끌었다. 동암중은 모두가 주인이었고, 소통에 두려움 없는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곳이었으며, 학부모와 학생 모두 학교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는 곳이었다. 욕설, 체벌, 꾸중 대신 칭찬과 웃음이 가득했던 동암중은 그에게 ‘2017 대한민국 참봉사대상’ 참교육공헌부문 대상, ‘대한민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상’ 교육부문 대상을 안겼다. 김경희기자

[6·13 도민의 선택_이재명을 만든 사람들] 성남시장 시절부터 호흡 맞춘 참모진 ‘집단 지성’ 빛났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경기도지사 당선인의 승리에는 수많은 참모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숨어 있다. 이 당선인이 선거 기간 내내 따라다닌 네거티브 공세를 극복하고 16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뤄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성남시장 시절부터 호흡을 맞춰온 참모 그룹 등 캠프 관계자들의 ‘집단 지성’이 원동력이 됐다는 분석이다.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인 문희상 의원(의정부갑)과 상임 선대위원장을 맡은 박광온 경기도당위원장(수원정)은 경선 갈등을 봉합, 경기지역 국회의원들의 단결을 이끌었다. 곽윤석 전략기획실장은 날카로운 판세 분석을 토대로 치밀한 선거 전략을 수립, 승리의 교두보를 마련했고 전략기획실 소속 김경환 팀장은 메시지를 전담해 유권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지난해 대선 경선에 이어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함께한 이우종 종합상황실장은 24시간 살아있는 상황실을 운영, 시시각각 변화하는 선거 상황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정책본부의 임근재(전 민주당 중앙당 조직본부 부본부장)·강상재 실장(한국외대 외래교수·전 성남문화재단 경영국장)과 김락중 팀장(전 성남시 정책공약 담당 비서관)은 이 당선인의 정책 공약인 ‘새로운 경기, 이재명의 약속’을 개발, 도민에게 제시했다. 이 당선인이 성남시장이던 시절 성남문화재단 문화진흥국장을 지낸 이영진 실장은 선거 사무장으로서 캠프의 살림살이를 맡아 알뜰하고 투명한 운영을 책임졌다. 김용 성남시의원은 조직본부 부본부장으로서 도내 31개 시·군의 네트워크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도록 했고 성준후 직능본부 부본부장은 각종 직능단체를 공략, 13만 명 이상 유권자들의 지지선언을 이끌며 세 불리기에 앞장섰다. 전형수 대외협력 본부장은 이 당선인이 일정상 참석하기 어려운 후보자 개소식이나 각종 행사장을 꼼꼼하게 챙기며 지지층 결집을 이끌었다. 성남시 최초 행정기획조정실장을 지낸 전 본부장은 정년퇴직을 1년 이상 앞둔 상황에서 사직서를 던지고 캠프에 합류했다. 특보단장을 맡은 정성호 의원(양주)과 조승문 특보단 부단장은 적재적소에 인재들을 배치·운용해 내부 결속력을 높였으며,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출신인 이희선 박사는 전문가 그룹인 집단지성센터 부센터장을 맡아 정책 아이디어를 발굴했다. 성남시 대변인을 지낸 김남준 공보실장과 언론인 출신인 김상호 언론특보는 차분하면서도 침착한 논평과 재빠른 언론 대응으로 경쟁자들의 네거티브 공세를 철벽 방어했다. 김병욱 의원(성남 분당을)은 수석대변인을 맡아 고공전을 진두지휘했다. 성남시 정책보좌관 출신인 임문영 실장은 톡톡 튀는 홍보물을 제작, 유권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울러 이 당선인과 부인 김혜경씨의 일정을 맡은 조계원 전 국회 정책연구위원과 의전 및 수행을 빈틈없이 소화한 김진욱·조영완 팀장도 숨은 공신으로 꼽힌다. 송우일기자

경기지사 이재명-도교육감 이재정 압승

헌정사상 여당이 지방선거에서 싹쓸이에 가까운 압승을 거두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경기도지사는 물론 시장·군수, 경기도의원, 시·군 의원까지 야당 당선자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더불어민주당이 사상 유례없는 완승을 거뒀다. 대한민국의 심장인 1천300만 경기호(號)를 이끌어갈 민선 7기 경기도지사에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당선됐다. 6·13 지방선거 최대 승부처였던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이 후보는 재선 도전에 나선 자유한국당 남경필 후보의 추격을 따돌리며 ‘새로운 경기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경기도교육을 책임질 도교육감에는 진보성향의 이재정 후보가 일찌감치 당선을 확정지으며 재선에 성공했다. 이날 개표 결과, 이 후보는 이날 밤 11시 현재(개표율 30.98%) 102만 3천400표(55.23%)를 차지해 68만 1천524표(36.78%)를 얻은 남 후보를 크게 앞서 새로운 도백으로 확정됐다. 바른미래당 김영환 후보는 8만 8천714표(4.78%)에 머물렀고, 정의당 이홍우 후보 4만 5천728표(2.46%), 민중당 홍성규 후보 1만 3천344표(0.72%)로 각각 집계됐다. 이 후보는 당선소감을 통해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확인했다. 마타도어, 흑색선전에 의존하는 낡은 정치를 끝내고 새로운 정치를 열라는 촛불의 명령을 재확인했다”면서 “기득권세력에 굴복하지 않고 공정한 세상,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평화의 시대, 번영과 미래의 한반도에서 경기도가 그 중심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5명의 후보가 경합을 벌인 도교육감 선거에선 이재정 후보가 같은시각(개표율 29.54%) 69만 6천101표(40.25%)를 확보, 41만 7천786표(24.16%)로 2위를 기록 중인 임해규 후보를 크게 앞서 사실상 당선이 확정됐다. 민주당은 도내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전통적 보수성향인 북부지역에서 완승을 거두는 등 현재 31곳 중 29곳에서 당선을 확정하거나 유력한 것으로 나타나 압승했다. 한편 이번 지방선거 투표율은 경기도 57.8%, 인천시 55.3%로 나타났으며, 전국적인 투표율은 60.2%로 잠정집계됐다. 김재민·송우일기자

[경기도지사 당선인 이재명 그는 누구인가] 공정한 세상 꿈꾸던 ‘無수저’… 경기도 정권교체 이뤄내다

6·13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 남경필 후보를 누르고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인권변호사 활동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 민선 5·6기 성남시장을 지냈다. 특히 이 당선인은 임창열 전 지사 이후 보수진영에서 차지해온 경기도에서 승리, 16년 만에 ‘경기도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탄핵 정국과 지난해 대선 경선을 거치며 ‘전국구 정치인’으로 거듭난 이 당선인은 초반부터 ‘이재명 대세론’을 형성했다. 특히 선거 막판까지 쏟아진 경쟁자들의 십자포화 속에서도 선두 자리를 당당히 지켜내며 경기도 탈환에 성공했다. ■ 칠남매와 자란 산골짜기 이 당선인은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이 당선인 스스로 “‘흙수저’도 못 되는 ‘무수저’의 삶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지난 1964년 경북 안동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래 5남4녀지만 누이 둘이 일찍이 세상을 떠난 탓에 5남2녀 중 다섯째로 자랐다. 이 당선인이 열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연 집을 떠났고, 어머니와 일곱 남매는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터무니없이 가난했다. 그는 이때부터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 상처로 얼룩진 소년공 시절 이 당선인은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족과 함께 성남의 가파른 언덕 꼭대기 빈민촌에 정착했다. 나이가 어렸던 그는 다른 이의 신분과 이름을 빌려 여러 공장을 전전하는 등 소년공 생활을 했다. 특히 거친 공장생활 중 많은 사고를 당했다. 그의 손가락에는 아직도 고무 조각이 박혀 있고 후각 세포가 55% 이상 괴사했다. 비록 냄새는 잘 못 맡지만 사회적 후각이 발달한 덕에 부패의 악취는 잘 맡는다고 이 당선인은 자부한다. 프레스기에 팔이 눌리는 큰 사고도 입었다. 당시 노동법에 산업재해 보상조항이 있었지만 그 사고에 책임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기계보다 값싼 노동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치료받지 못한 팔은 멋대로 비틀어졌고 굽은 팔을 가리려 사시사철 긴소매만 고집하게 됐다. 이로 인해 훗날 병역이 면제됐다. 그는 학교도 못 다녔는데 군대조차 갈 수 없다는 게 또 하나의 좌절이었다고 털어놨다.그저 평범한 삶을 살며 차별받지 않는 것이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공장 관리자가 고졸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관리자가 되면 매 맞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공부에 매진,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처참한 상황에서도 각고의 노력으로 고졸 신분이 됐지만 기회가 차단된 환경에서 다시 공장 신세를 이어나가야만 했던 현실에 또 한 번 좌절했다. ▲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시절의 이재명 당선인. ■ 우연이 빚은 운명, 법대생 이재명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단행했던 교육개혁 조치가 이 당선인의 인생에 전화위복이 됐다.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학력고사만으로 대학에 갈 수 있게 됐고, 과외가 금지되면서 장학금 제도가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이 당선인은 생계를 위한 공장 일과 공부를 독하게 병행해 마침내 학력고사에서 전국 순위 3천등 이내에 드는 고득점에 성공했다. 인권이 유린된 삶에서 벗어나고픈 지독한 갈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서울대 입학도 가능했지만, 그는 고심 끝에 전액장학금에 매월 생활비 30만 원이라는 파격 조건을 내건 중앙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중고교 시절 정상적인 학창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는 교복도 입어보지 못한 한을 풀고자 대학 입학식 날 아무도 입지 않는 대학 교복을 맞춰 입고 참석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주는 생활비 일부를 다달이 셋째형에 보내 공부를 도왔다. 7남매 중 대졸자는 그와 셋째형 둘뿐이다. 훗날 그와 부당한 시정개입 등을 이유로 갈등을 빚었던 바로 그 형이다. 1982년 그는 우연히 유인물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접했다. 매스컴의 말대로 광주시민은 폭도라 믿었던 이 당선인이었다. 권력과 언론에 속아왔다는 분노는 이내 정의구현을 향한 의지로 바뀌었다. ■ 판검사 버리고 택한 인권변호사 1986년 제28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는 사법연수원에서의 성적도 좋았다. 하지만 그는 판검사 임용을 앞두고 갈등을 거듭한다. 군사정권의 주구가 되지 않겠다는 소신과 집안형편 사이의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의를 듣고 그의 철학에 매료된다. “변호사는 굶지 않는다”던 그의 말을 믿어보고 싶었다. 1987년 7월14일 이 당선인은 일기장에 이러한 결의를 남겼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나의 지식과 자격을 필요로 한다. 역사가, 민족이, 노동자가 핍박받고, 가난한 민중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는 마침내 변호사 개업을 결심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사법고시 최종합격 한 달 뒤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어머니에게는 성적 때문에 변호사를 하게 됐다고 둘러댔다. 차마 판검사 자리를 제 발로 차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였다. ■ 치열했지만 한계 느꼈던 시민운동 변호사 이 당선인은 성남에서 주로 노동과 인권사건 변호를 맡으며 민변 활동을 했다. 시민들과 뜻을 모아 ‘성남시민모임’을 창립하며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의혹’과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을 파헤쳤다. 정치권력, 언론, 돈, 조직 등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지만 거대한 부패 기득권 세력 앞에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다. 2004년 성남 구시가지의 대형병원들이 문을 닫으며 의료공백이 심각해졌다. 이에 공공의료원 설립을 목표로 시민 2만 명의 뜻을 모아 주민발의 조례를 만들었는데 시의회로부터 47초 만에 날치기를 당하고 만다. 한 교회 지하실에서 서럽게 울던 그는 시민의 권한을 대리하는 시장이 돼 직접 시립의료원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정치 입문을 결심한 순간이다. ■ 시민이 주인인 성남 이 당선인은 2010년 51.2%의 득표율로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시장이 된 그가 처음 마주친 것은 6천500억 원이 넘는 부채였다. 그는 이를 청산하기 위해 곧바로 허리띠를 졸라맸다. 부채 청산 및 복지의 비결은 이른바 ‘3+1원칙’이다. 부정부패, 예산낭비, 세금탈루를 없애고 그렇게 아낀 예산으로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시장실도 2층으로 옮겨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했다. ‘아방궁’이라 비난받던 기존 9층 시장실에 아이사랑놀이터와 북카페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또한 SNS로 시민과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며 시정을 알리고 보완해나갔다. 2013년 마침내 정치 입문의 계기이자 공공성의 상징인 시립의료원의 첫 삽을 떴다. 2014년 그는 득표율 55.1%로 재임에 성공한다. 이때 보수가 우세한 분당에서 오히려 득표율이 오르는 이변이 일어났다. 실적과 실력만으로 불리한 정치지형을 극복해낸 것이다. 그러나 여소야대의 시의회 돌파는 녹록지 않았다. ‘청년배당·산후조리·무상교복’으로 대표되는 3대 무상복지 역시 시민들과 손잡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이룬 결실이었다. 이 당선인은 성남시장으로서 살림, 소통, 복지, 공약이행 등 수많은 성과를 일궈냈지만 시민의 주권의식을 공고히 한 것에 가장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시민이 주인인 성남’이라는 슬로건처럼 그는 언제나 시민이 주권자고 정치인은 대리인일 뿐임을 강조했다.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을 해소하고 참여를 독려하며 민주주의의 본질을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 ■ 나침반은 오직 공정함 무수저로 태어나 가혹한 환경을 경험한 이 당선인을 이끌어온 나침반은 언제나 공정을 향해 있었다. 지난 2016년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그는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국민과 가장 가까운 촛불의 선봉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부르짖었다. 진정성을 알아본 국민은 그를 단숨에 대선 경선후보로까지 불러냈다. 이때 이 당선인은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소명을 분명히 했다. 이 당선인은 “이제 도민들은 경기도에서 그 쓰임을 다 하라고 명했다”며 “이재명이 경험과 실적, 성과를 바탕으로 도민 누구나 자긍심을 느끼는 새로운 경기도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학력 -삼계초등학교 졸업 -중고교 검정고시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 경력 △(전) 제19대 대통령선거 더불어민주당 경선후보 △(전) 민선 56기 성남시장 △(전) 민주통합당 기초자치단체장협의회 의장 △(전) 국가청렴위원회 성남부패방지신고센터 소장 △(전) 성남시립병원설립운동본부 공동대표 △(전) 성남참여연대 집행위원장 △(현)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연대위원 △제28회 사법시험 합격(사법연수원18기) 송우일기자

[6·13 국민의 선택_그는 누구인가] 더불어민주당 박남춘 인천시장 당선인

300만 인천시민은 민선 7기 인천 호를 이끌어 갈 적임자로 더불어민주당 박남춘 인천시장 후보를 선택했다. 박 당선인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현역 시장인 유정복 자유한국당 후보를 제압하고 인천시장에 당선됐다.박 후보의 당선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정에서의 보수세력에 대한 실망감과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긍정적인 분위기가 각각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 당선인이 주장했던 ‘지방적폐 청산’이 시민들의 표심을 자극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선거결과로 인해 인천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먼저 남북,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 펼쳐진 평화체제 속에서 박 당선인이 공약한 남북교류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이외에도 원도심과 신도시의 균형발전1조원대 중소기업 육성자금 지원과 B-MeC 벨트 조성 등 미래산업 육성제2경인선 건설과 서울지하철 2호선 연장 등 인천 교통망 확충사람중심 복지 등의 대표 공약도 기대된다.인천의 변화를 이끌어 갈 박 당선자가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 피난민의 아들… 어려운 이웃에 눈뜨다 과일장사 어머님과 인천 미8군 항만사령부 군무원 아버지. 박 당선인은 전쟁의 설움을 안고 황해도 은률에서 인천으로 피난 나오신 부모에게 각별한 애정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설 천주교 사립학교인 박문초등학교로 전학 하면서 자연히 천주교를 접했고 지금의 신앙생활을 하는 계기가 됐다. 동산중학교 2학년 때 쪽방촌 이웃 사람들의 팍팍한 삶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청소년적십자회(RCY)에 가입,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을 계기로 제물포고등학교 시절에도 RCY의 경기도 지역 중등부 회장을 맞아 농촌 봉사활동을 이어갔다. 제물포고 1학년 때에는 전통 운동서클인 야간농구부에 가입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수업이 끝난 후 2~3시간 농구를 했다. 심지어는 입시가 코앞이었던 고3 때도 그랬다. 친구들로부터 ‘조금씩 쉬어가며 해라’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박 당선인은 ‘인생은 마라톤 풀코스’라는 생각에 따라 체력 관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을 때에는 모든 정신을 가다듬어 집중하는 전략을 세웠다. 박 당선인은 “운동으로 다져진 체력은 후배들과 비교해도 자신할 만하다.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끈기 있게, 집중적으로 공부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운동을 통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 맞선 ‘원칙과 신뢰’ 당초 법관이 꿈이었던 박 당선인이 고려대 법대를 다니며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시절, 한 교수님의 “미국 같은 선진국들은 법조인이 인정받는 시대에서 행정가들이 주도하는 행정국가로 바뀌었네. 우리나라도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이고 유능한 행정가가 되어 세계를 무대로 역량을 펼치는 것이 어떤가. 굳이 법관이 되에 작은방에서 한평생을 보낼 것인가?”라는 말씀은 진로가 바뀌는 계기가 됐다. 이 말씀을 계기로 부모님과 주변 친구들이 기대하던 법관의 꿈을 접고 행정가로 나서게 된다. 박 당선인은 22세에 1981년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수습사무관을 시작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행시 합격생 동기들이 선호하는 곳은 내무부와 경제관련 부처였지만 박 당선인은 비인기 부서인 해운항만청을 지원하며 바다 행정과 첫 인연을 맺었다.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다(民無信不立)’ 논어에 나오는 한 구절로 공직자가 국민의 신뢰를 받으려면 진실해야 하고 진실을 믿고 원칙과 소신에 따라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박 당선인은 ‘원칙과 신뢰’라는 공직 생활의 좌우명은 가슴에, 양복 주머니에는 사직서를 각각 품고 다녔다. 전두환 5공화국 시절, 해양항만청에서 엄청난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부산항 관내 공유수면 매립 업무를 맞았다.당시 ‘살아있는 권력’으로부터 대통령의 형이 대표를 맡은 업체에 이권 편의를 주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 업체는 지역주민과 갈등으로 공사를 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대통령이 직접 해운항만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압력을 넣을 정도였다. 하지만 업체와 주민을 설득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절차를 밟아 9개월만에 문제를 해결했다. ■ 노무현 前 대통령과 ‘혁신바람’ 국민의 정부 시절 해양부 근무 당시 국장 승진이 코앞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노무현(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장관으로부터 승진은 고사하고 총무과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노 장관의 설득력은 대단했다. 졸지에 온라인 업무처리와 지식 관리를, 조직 혁신도, 공정함과 신뢰도 함께 받을 수 있는 능력자(?)로 평가 받았다. ‘혁신’이라는 낯선 단어 앞에 처음 섰던 이날 서점으로 곧바로 달려가 ‘혁신’이라 쓰인 책을 한 보따리 구입했다. 노무현 장관과 맺어진 인연은 이후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과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인사수석(차관급)까지 이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사는 세상’의 철학을 공유했고, 이를 실현할 시스템을 배우고 경험했다. 특히 참여정부 인사수석 시절 박 당선인은 ‘삼다일공(三多一公)의 원칙을 갖고 임했다. ‘삼다’는 ‘다원(多源)’, ‘다청(多廳)’, ‘다로‘(多勞)’였으며, ‘일공’은 ‘공평무사(公平無私)’이다. 그는 이 같은 인사 원칙으로 인사 잡음을 봉쇄하고,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 고향 인천에서 다시 태어나다 19대 인천 남동구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부터는 인천과 남동구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박 당선인에게 인천은 단순히 정치를 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도림동(숫골) 과수원집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여전히 간석동에서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지역구에 논현경찰서, 남동우체국, 수인선 터널식 방음벽도 단계적으로 설치했다. 이 밖에도 남동공단은 최첨단 리모델링 단지로, 소래포구는 국가 어항으로 예비 지정되는 등 남동구 5대 숙원사업을 해결했다.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특권 폐지 등의 성과를 인정받아 300명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한 4년 의정 종합평가에서 7위, 인천지역 1위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크게는 소방안전교부세를 신설, 국가의 안전예산을 확충했고, 남동구 골목 골목에는 범죄예방 CCTV 시스템을 구축해 ‘안전이 곧 민생이다’라는 원칙을 실천하고 있다. 박 당선자는 더불어민주당 후보 경선 과정에서 상대 후보의 혹독한 검증을 겪었다. 하지만 경선에서 승리한 이후 경쟁 후보들을 모두 캠프 인사로 모셔 원팀을 구성하는 등 아름다운 경선을 실현한 바 있다. 유제홍·수습 이승욱기자

[사설] 이재명 후보를 경기도민이 선택했다

선거가 끝났다. 여러모로 특별했던 선거다. 선거판은 일찌감치 기울었다. 여당의 압도적 우세가 선거 기간 계속됐다. 야당의 추격이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유권자들에게는 ‘하나 마나 한 선거’라는 의식이 번졌다. 때마침 시작된 남북ㆍ북미 회담도 분위기에 큰 영향을 줬다. 공식 선거 운동은 4월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시작해 하루 전 북미 정상회담으로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최저 투표율을 예상한 의견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사정은 달랐다. 사전 투표에서 이미 17%가 넘는 투표율을 보였고, 최종 투표에서는 50%대 후반의 투표율을 보였다. 4년 전 지방 선거 때보다 오히려 높아졌다.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의미가 여기 있다. 유권자들의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지방을 걱정하고 선량을 선택했다. 관심 실종이라느니, 정치 외면이라는 일부의 전망을 보기 좋게 망신줬다. 프랑스 계몽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말했다. “인민은 투표일 하루만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 자유인이 된다.” 물론 그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한 말이다. 투표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결국 선택된 정치인들의 세상임을 개탄한 말이다. 하지만, 그 ‘하루’의 의미에 충실한 수많은 유권자들의 정신은 숭고하다. 그 제한된 참정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가 무섭게 표현됐다. ‘욕하려면 투표해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후보들에겐 얼마나 피 말리는 선거 기간이었나. 오늘(13일) 하루는 또 얼마나 절박한 시간이었나. 단 하루만 더 달라고 하고 싶었을 게다. 단 한 표만 더 달라고 하고 싶었을 게다. 쏟아지는 빗 속에 우의를 입고 인사를 하던 순간, 외면하는 시민을 쫓아가 절하며 손을 내밀던 순간, 쏟아지는 민원을 받아적으며 꼭 실천하겠다고 약속하던 순간…모든 순간이 피 마르고 절박했을 것이다. 이 모든 모습들을 유권자가 기억하고 있다. 경기도지사 선거가 준 실망이 컸다. 정책은 없었고 폭로만이 그득했다. 그 탄착점에 이재명 후보가 있었다. 온갖 비방과 의혹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그 순간 유권자의 따뜻한 손길이 얼마나 그리웠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결국, 유권자는 이 후보를 선택했고, 4년간의 도지사직을 그에게 맡겼다. 이 후보에게는 1,300만으로부터 받은 기회가 온 것이다. 그의 복지 정책과 개혁 정신, 그리고 일 추진력에 대한 도민의 믿음이다. 때마침 경기도는 새로운 천 년을 열어갈 출발선에 있다. 그가 꿈꾼 도정의 완벽한 실현이 새로운 경기도의 시대정신과 맞물려 위대한 웅도의 역사를 만들어 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