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정서 담은 감동작품… 세계무대서도 통한다”
책벌레였던 남자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라디오 프로그램 ‘은방울과 차돌이’에서 차돌이 역할을 맡으며 일찌감치 방송계에 발을 디딘다. 어느새 50이라는 나이를 훌쩍 넘어섰지만 지금까지 방송국 문턱을 제집처럼 드나든다. 수더분한 옆집 아저씨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비열한 아버지 역할로 분한다. 그런 그가 한국 최초의 비언어(非言語) 연극 ‘난타’를 들고 나타났다. 처음엔 ‘뭔가?’ 하던 국민들이 열광했다. 이어 뉴욕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했다. 아시아 국가에선 처음있는 일이다. 새로운 길을 열고 기적을 만든 문화 수출자이자 문화 CEO, 바로 PMC프러덕션 송승환 회장이다. 난타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작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그의 열정의 산물이다.
-2010년 성신여대 융합문화예술대 초대학장에 취임하면서 30년 넘게 핀 담배를 끊으셨다면서요.
“못끊었어요. 다시 피고 있어요.(하하) 실패하긴 했지만 많이 줄였습니다.
-대학에서의 융합 문화, 여전히 낯선데요. 어떤 의민가요.
“요즘 융합이 유행이다시피 많잖아요. 말 그대로 융합이에요. 무용과 학생이 학점을 인정받으면서 연극과, 음악과 수업을 들을 수 있어요. 무용하는 친구도 연기나 음악을 알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 경영까지 공부할 수 있도록 크로스해서 수강할 수 있게 한 거죠. 졸업생이 없어 성과를 알수는 없지만, 학생들이 많이 달라졌다는 건 확실합니다.”
-문화관광체육부장관 물망에도 올랐었죠? 문화 산업의 패턴을 바꿀 수 있는 적임자라는 생각도 드는데.
“물망에 오른 게 아니고, 구체적인 제의를 받았어요. 제가 고사한 거고. 직접 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요.(하하) 행정일 하시는 분들한테 현장 일을 잘 전달하면 되는 거지, 제가 직접 그 자리에서 일하기엔 능력도 부족하고 일단 저는 자유스럽게 살고 싶어요.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 건 하고 싶지 않습니다.”
-흔히 ‘대박 터뜨린 연예인’으로 꼽힙니다. 솔직히, 얼마나 버셨나요.
“난타가 대박이 났죠, 제가 아니라. 1997년도에 초연하고 올해로 15년 됐는데 지금도 계속 매진이에요. 돈이 없어서 초기에 투자를 많이 받았어요. 극단을 주식회사로 만들었는데, 국내선 최초죠. 결국 PMC프러덕션이라는 회사가 돈을 많이 번 거죠. 저는 회사 대표로 월급 받고, 주주 중 한 사람으로 배당을 받는 게 전부에요.”
-난타의 성공 비결에 대한 질문은 아마 지치도록 받았을 겁니다. ‘성공 비결’, 도대체 뭡니까.
“난타는 사물놀이 리듬이 가지고 있는 원시적 폭발력과 주방이라는 친근한 드라마적 요소가 빛을 발하면서 1997년 초연 이래 매진 행렬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우선 ‘비언어극’이라는 게 먹혔죠. 세계 진출이 목표였으니까요. 국내 전용관을 만들어 해외 관광객들도 공연을 볼 수 있게 했죠. 둘째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작품을 업그레이드 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패밀리 쇼’라는 특징도 성공 요인이죠. 우리나라 연극이라는 게 과거에는 대학 졸업한 일부 지식인들만 보는 걸로 인식됐는데, 난타는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까지 웃고 손뼉칠 수 있는 쇼라서 오랫동안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돈이 없으셨다면서요. 난타를 만드는 과정도 그렇고, 해외진출할 때까지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
“고비가 많이 있었죠. 해외에 한국 연극이 알려지지 않아 작품을 설명하기 보단 한번 와서 보라고 권했어요. 어렵게 세계적인 공연축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했는데, 관객 동원에 성공했어요. ‘브로드웨이 아시아’라는 미국 에이전트를 고용해서 우리보다 정보가 많은 그들이 해외프로모터들에게 활발히 소개한 것도 기여했죠. 어려운 고비야 수도 없이 많았는데, 지나가고 나면 다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거죠.(하하)”
-그동안 문화공연이 성공하지 못했던 원인 중 하나로 마케팅을 꼽으셨어요. 난타의 마케팅 전략은 뭔가요.
“모든 기획자가 작품을 잘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판매하려는 노력은 안 해요. 저는 작품을 만드는 노력만큼 티켓을 파는데도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이 아무리 좋으면 뭐합니까. 홍보 안 하면 몰라요. 저는 원하는 수치가 될 때까지 적극적으로 홍보하자는 마인드에요.”
-성공한 CEO로서 경영·기획 쪽에 전념할 수도 있는데, 드라마 출연도 꾸준하고 방송에도 자주 나오는데 이유가 있나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배우였고, 배우를 은퇴한 적은 없잖아요.(하하) 예전만큼 활발하게 활동할 순 없지만 1년에 한 편 정도는 드라마가 됐든, 연극이 됐든 하자는 원칙을 갖고 있어요. 이번에 JTBC를 통해 방송될 드라마 ‘무자식 상팔자’에서 아들 셋 중 둘째 아들 역을 맡았어요. 이번 작품은 ‘목욕탕집 남자들’, ‘내 사랑은 누굴까’ 이후로 10년 만에 김수현 선생님과 함께 하는 작품이에요. 오랜만이죠.”
“앉혀놓고 강의하지 않아도 제가 난타로 애든버러를 가고 해외 시장 진출하는 걸 보고 후배들이 ‘점프’를 만들었어요. 마케팅 역시 후배들이 열심히 하고 있고요. 굳이 강의하거나 조언하는 것보다 보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창의력 마인드, 적극적인 마케팅에 대해 늘 이야기하죠.”
-뮤지컬협회 이사장으로 뮤지컬 육성 차원에서 좀 더 하실 일도 많을 꺼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사장이라고 뭐 다 할 수 있나요. 단계적으로 해야죠. 이 시점에서는 창작뮤지컬을 활성화시키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것 때문에 8월6일부터 서울뮤직페스티벌을 열죠. 연간 100편이 넘는 창작 뮤지컬이 만들어지는데 관객들은 잘 몰라요. 이번 페스티벌을 통해 뮤지컬인들끼리 네트워크도 단단해지고 우리 창작뮤지컬도 활성화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 공연계 앞으로 어떤 쪽으로 흘러가야 할까요. 방향을 제시해주신다면.
“한국무용이나 국악처럼 상업화되기 어려운 공연 분야가 있어요. 국가의 자존심이기 때문에 상업성이 없다고 거들떠보지 않으면 안돼요. 순수예술은 나라가 잘 살면 잘 살수록 육성하고 보호해야죠. 반면 공연 문화는 상업화를 시켜야 하는데 비즈니스 마인드가 부족해요. 어설픈 거죠. 5천만 국내시장으로는 (상업화가)힘들어요. 해외 시장을 개척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배우 되고 싶고, 가수 되고 싶어하는데 시장이 작아서 걱정이에요. 시장이 작으면 아이들 꿈만 있지 현실 가능성이 없거든요. 순수는 순수대로 굳건하게, 상업은 상업대로 굳건하게 가야 합니다.”
대담=박정임 문화부장 bakha@kyeonggi.com
정리=장혜준기자 wshj222@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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