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경기도로 몰리는 난민, 아직 대책이 없다니

올해 들어 제주도로 몰려온 500여 명의 예멘인이 한국 사회에 난민 문제를 숙제로 던졌다. 무사증(無査證ㆍ무비자) 제도를 이용해 제주도에 상륙해 집단 난민 신청을 한 예멘인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인도주의적 수용론과 함께, 난민 신청을 받지 말고 추방하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갑자기 등장한 이슬람 난민에 대한 이질감과 불안감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무사증 입국과 난민법 폐지’ 글을 올리며 난민 수용을 반대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난민 신청을 한 예멘인은 549명이다. 이들 중 487명이 ‘출도 제한자’로 분류돼 제주에 머물고 있다. 대부분 20~30대 남성들로 잠시 낚시어선업, 농업, 요식업 등에서 일하지만 육지 진출을 꿈꾸고 있다. 특히 외국인 일자리가 많고 각종 지원제도가 있는 수도권이 1순위로 꼽히고 있다. 조만간 심사를 통해 난민 지위를 부여받거나 출도 제한 조치가 풀리면 수도권으로 옮길 것으로 보인다. 예멘 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정착지가 경기도다. 그 중에서도 안산이다. 주민들은 벌써부터 불안감에 반발하고 있지만 안산시나 경기도 모두 난민 대책은 전혀 없다. 안산시는 우리나라 최대 다문화도시다. 세계 104개국에서 온 8만2천여 명의 외국인이 살고 있고, 난민도 60여 명 거주한다. 각종 외국인 커뮤니티가 탄탄하고, 반월ㆍ시화공단이 가까워 일자리가 많기 때문에 쉽게 정착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춰 외국인이 계속 늘고 있다. 올 6월까지 안산지역 난민 신청자는 1천347명에 이른다. 포천(997명), 동두천(750명), 수원(740명), 평택(722명), 파주(570명) 등도 각각 500명이 넘는다. 난민은 이제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멘 난민을 비롯한 상당수 난민이 안산 등 경기지역에 거주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현재 난민은 국정원이나 경찰 등으로부터 거주지 보호 관리를 받지 않아 소재지 파악이 안 된다. 도나 시ㆍ군도 지역내 난민 수를 잘 모른다. 난민 정책에 대한 적극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난민이 몰려들어 여러 문제가 야기된 후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너무 늦다. 난민 대책이 어려운 문제이긴 하다. 다문화정책과는 또 다르다. 난민 문제는 배타주의도 지나친 온정주의도 곤란하다. 이슬람을 폄훼하는 등 반감을 드러내는 배타주의는 지양해야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수용하는 것도 문제다. 한편에선 난민 브로커를 통한 ‘기획 난민’ ‘난민 비지니스’ 등 국내 체류 및 취업 방편으로 난민법을 악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부가 적극 나서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경기도나 안산시도 선제 대응책을 마련, 정부와 머리를 맞대야 한다. 내ㆍ외국인 상생 방법을 찾고, 사회 불안과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사설] 시민단체가 시작하는 평택·당진 상생 프로젝트 / 정치에 찌들었던 과거 이벤트와 다르길 바란다

사단법인 평택당진항 포럼이 출범했다. 평택항ㆍ당진항의 건전한 발전과 미래지향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법인의 목적이다. 법인에 포함된 인사들의 면면에서 이런 목표가 엿보인다. 경기도, 충청남도, 평택시, 화성시, 당진시, 아산시 인사들을 망라했다고 한다. 관할 부처인 해수부로부터 법인 등록이 허가된 것은 5일이다. 평택과 당진 지역의 상생을 목적으로 민간단체가 사단법인 형태로 출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평택항과 당진항의 갈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한두 가지도 아니다. 산업단지에서 발생하는 오염 문제에 대한 두 지역 간 갈등이 상당하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에서 오는 갈등 역시 뿌리 깊다. 매립지 관리권 문제 및 연륙교 건설 등은 지금도 해결되지 못한 현안이다. 평택당진항 포럼은 이런 갈등을 민간 차원에서 접근하고 정책적 조언을 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우리가 기억하는 ‘경기-충청 상생 협약’의 추억이 있다. 2005년 당시 손학규 경기지사와 심대평 충남지사가 상생협약을 맺었다. 서울 프라자 호텔에서 100여 명의 관계자와 언론이 참석한 가운데 거창하게 시작했다. 그 협약의 첫 번째 약속에 평택항과 당진항 일대 상생 개발이 있다. 하지만, 결과로 이어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보다는 경기도와 충청권을 대표하는 두 잠룡(손학규ㆍ심대평)의 정치적 행보에 초점이 맞춰졌다. 또 다른 상생 협약은 2006년 7월13일에 있었다. 당시 김문수 경기지사와 이완구 충남지사가 당사자였다. 앞선 ‘손-심 상생협약’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목적하에 4가지 사항에 합의했다. 이 역시 세종시 직할 문제를 두고 두 지사가 충돌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김 지사와 이 지사도 당시로써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대표하는 차기 대권 후보였다. 결국, 두 번의 ‘경기-충청 협약’은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을 둔 정치가 망친 예정된 결과였다. 이번에 출범한 평택당진항 포럼에 우리가 의미를 부여해 보려는 것도 그래서다. 법인이 밝히고 있는 구상이 평가할만하다. 현재 부각된 문제 외에도 항만문화, 해양레저, 관광기능 등에 대한 콘텐츠 개발을 지원하겠다고 한다. 또 해양안전, 환경, 보안, 항만 노동 문제에 대한 연구조사 토론회도 펴 갈 계획이라고 한다. 적어도 청사진에서만큼은 정치인 위주의 과거 접근과 차이가 느껴진다. 평택항과 당진항은 환 황해권 경제 권역의 핵심이다. 전국 어떤 지역의 접경지보다 상생의 필요성이 절박하다. 이걸 해내지 못하면서 그동안 환 황해권 경제 벨트가 유명무실해온 것이다. 모처럼 정치색 없이 출발한 평택당진항 포럼이 이런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 새 역사의 작은 싹을 틔어 가기 바란다.

[인천시론] 고약(苦藥) 정치

지난 8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통계청장과 기상청장을 전격 교체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두 차관급 인사는 당초 인사 대상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지만, 각종 논란이 겹치면서 문 대통령이 문책성 인사를 실시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기상청의 잦은 오보로 인해 ‘중계청’이란 오명과 제19호 태풍 ‘솔릭’의 ‘호들갑’ 예보로 인한 과잉 대응 등 국민들에게 불신감을 줬다는 점에서 기상청장의 교체는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통계청장의 경질은 이해하기 어렵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소득부문 가계동향’에 대한 표본을 늘리는 과정에서 소득5분위(하위20%) 계층을 과도하게 늘려 잡아 결과적으로 빈부격차가 커져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이 주요 경질 사유라고 한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즉 소득주도성장이 실패했다는 논란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통계청은 당초 가계동향 발표를 없애려 했지만 문재인 정부가 ‘통계 존치’로 입장을 선회하면서 표본가구를 5천500가구에서 8천가구로 늘려 잡았다. 이 과정에서 소득하위 20% 가구 수가 과도하게 포함되면서 지난해와 비교할 경우 격차가 매우 커진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착시 효과를 빚어내게 됐다는 것이 통계청의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이 정도 표본 차이가 통계 흐름을 바꿀 정도는 아니라고 지적한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도 국회에서 “표본 오류로 분배 격차가 심화됐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임명 당시 문재인 정부와 정책 ‘코드’가 잘 맞는다는 평이 따랐던 황수경 전 청장. 하지만 청와대는 통계청이 경제지표를 조사하고 국민에게 설명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황 전 청장을 전격 교체하더니 급기야 소득주도성장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줄 수 있도록 통계청에 새로운 조사 방법을 마련하라는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청와대 입맛에만 어울리고, 국민들에겐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맞춤형 통계’가 나올까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시대 대사헌을 지냈던 ‘고약해(高若海)’라는 인물이 있다. 순우리말 ‘고약하다’의 어원이라고 알려진 고약해는 어전에서 세종을 노려보고 서슴없이 직언을 일삼는 건 예삿일이고 지엄한 어명에 대꾸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곤 했다. 세종이 하도 기가 막혀 마땅한 이유 없이 반론을 펴는 신하를 보면 “이런 고약해 같은 놈”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세종은 이런 고약해를 형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의 자리까지 등용한다. 또 자신의 세자 임명을 강력히 반대했던 황희 정승도 내치기는커녕 무려 24년간 재상을 시키는 등 많은 세제 개혁과 정책을 추진했다. ‘양약고구(良藥苦口)’, 즉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말이다. 중국 한나라 유방이 오랜 전투에 지쳐 궁궐에서 쉬려고 할 때 부하 번쾌와 장량의 거듭된 충고를 받아들여 다시 전쟁터로 향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충언이나 직언은 귀에 거슬린다는 뜻이다. 이번 통계청장 인사를 보면서 과연 문재인 정부가 쓴 소리, 고약한 비판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염려스럽다. 좋지 않은 경제 상황을 나타내는 객관적 수치를 통해 제대로 된 경기 부양책을 모색해야지, 통계 자체를 부정하거나 입에 맞는 달콤한 통계로 현 상황을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이나 진나라를 정복하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언, 고약을 마다하지 않는 정치가 펼쳐지길 기대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이도형 홍익정경연구소장

더불어민주당-경기도 예산정책협의회

인천시·더불어민주당 2018 인천예산정책협의회

수원시 취업자 수·고용률 고른 ‘상승 곡선’

최근 들어 국가 고용지표가 악화되고 있지만, 수원시 취업자 수와 고용률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고용률은 특정 계층에 치우치지 않고 청년·여성·중장년층이 고르게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이 주관하는 ‘2018년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 결과에 따르면 수원시 취업자 수는 60만 3천900명으로 2017년 상반기보다 1만 3천500명(2.3%) 늘어났다. 2017년 하반기 취업자 수는 59만 6천명이었다. ■상용 근로자 늘고, 임시·일용근로자 줄고 취업자 중 상시 고용 근로자는 37만 8천200명으로 2017년 상반기(34만 4천500명)보다 3만 3천700명 늘어났고, 임시·일용근로자는 11만 4천300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14만 3천500명)보다 2만 9천200명 줄어들어 일자리의 질은 다소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비임금근로자는 11만 1천300명으로 2017년 상반기(10만 2천500명)보다 8천800명(8.6%) 늘어났다. 비임금근로자는 자영업자, 무급 가족 종사자 형태 근로자를 말한다. 지난 2년 동안 감소세를 보이던 비임금근로자 수가 증가한 것은 베이비 붐 세대(1955~1963년생) 은퇴와 함께 자영업자가 증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17년 상반기 57.9%였던 고용률은 2017년 하반기 58.1%, 2018년 상반기 58.7%로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취업자 중 청년층 비율, 전국 154개 시·군 중 가장 높아 계층별 고용률은 청년층(15~29세) 42.0%, 여성층 46.8%, 중장년층(50~64세) 68.4%로 2017년 상반기보다 청년은 1.0%P, 여성은 2.6%P, 중장년은 3.7%P 상승했다. 전체 취업자 중 청년층이 차지하는 비율은 17.0%로 전국 154개 시·군 중 가장 높았다. 경제활동 참가율은 61.6%로 전년(60.1%)보다 1.5%P, 15~64세 고용률은 63.1%로 전년(62.3%)보다 0.8%P 증가했다. 경제활동 참가율은 경제활동인구 수를 15세 이상 인구수로 나눈 것이고, 고용률은 취업자 수를 15세 이상 인구수로 나눈 것이다. 수원시는 맞춤형 일자리 정책 정책으로 일자리 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6월에는 고용노동부 주관 ‘2018년 전국지방자치단체 일자리 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4년 연속 최우수상’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민선 6기, 지역 일자리 17만 개 창출’을 목표로 세웠던 수원시는 2018년 5월 31일 기준으로 지역 일자리 18만 4천728개를 창출해 목표를 초과 달성하기도 했다. 수원시는 ‘수원형 새-일 공공일자리 사업’, ‘베이비붐 세대 경력·전문성을 활용한 신중년 디딤돌 사업’, ‘여성&신중년 일자리 박람회’ 등 모든 세대·계층을 아우르는 일자리 시책을 펼치고 있다. ■맞춤형 청년 일자리 정책으로 청년에게 힘 실어줘 특히 맞춤형 청년 일자리 정책과 구직 청년 지원 정책으로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일본 IT 기업 취업 지원 과정’, ‘수원 세대융합 창업캠퍼스’ 등이 대표적인 청년 일자리 창출 사업이다. 공공일자리를 창출하는 ‘새-일 공공일자리 사업’은 청년 중심 일자리 사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한다.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최초로 시작한 일본 IT 기업 취업 지원 과정은 만 34세 이하 미취업 청년들에게 일본 유수 정보통신기업 취업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제1기 수료생 30명 중 26명, 제2기 수료생 29명 중 28명이 취업에 성공했고, 제3기 수료생 25명은 전원이 취업하는 성과를 거뒀다. 구직 청년을 지원하는 정책도 청년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올해는 수원에 거주하는 만 19~34세 이하 취업 준비 청년에게 면접 정장을 무료로 빌려주는 ‘청나래’ 사업과 교통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심사를 거쳐 선발한 취업 준비 청년에게 30만 원이 충전된 교통카드를 지원하는 ‘청카드’ 사업을 시작했다. 수원시 청년을 정규직으로 채용한 청년내일채움공제 가입 기업에 수원시가 채용장려금을 지원하는 ‘수원형 청년내일채움공제’ 사업은 2월 시작했다. 수원시 관계자는 “베이비 붐 세대 등 신중년층을 위한 일자리 사업을 확대하는 등 신중년 일자리 지원대책을 강화하겠다”면서 “또 청년·여성 등 계층별 일자리 사업을 강화하고, 공공부문 일자리를 지속해서 확대해 ‘일자리 도시 수원’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채태병기자

[천자춘추] 한의학이 일제 강점기의 유산?

세계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든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피지배 국가의 민족문화를 말살하려 했다. 그것이 식민지 지배를 수월하게 하고, 독립운동 등 저항을 막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도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한글, 문화 등과 함께 ‘한의학’도 민족문화말살정책의 피해를 크게 입었다. 조선시대까지 이 땅의 주류의학이었던 중세한의학은 대한제국 시절 고종황제에 의해 당시의 신문물이었던 근대 서양의학과 결합하여 통합의료를 시행했다. 근대한의학으로의 발전과정이었다. 당시 궁내부의 내의원과 전의감에 한의사와 양의사가 모두 전의로 임용되었고, 궁내부 위생국장이나 병원장은 한의사가 임용되었다. 아마도 세계최초의 양한방 협진이 아닐까 싶다. 또한 현(現)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관립의학교 초대교장으로, 종두법을 도입해 현대한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한의사 지석영 선생이 임명됐다. 이렇게 차근차근 진행되던 근대한의학의 발전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며 상황이 급변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행정권이 일제의 통감부로 넘어가자, 한의와 양의가 공존하던 광제원은 강제로 폐쇄조치 되고 통감부가 설치한 대한의원에서 일본인 병원장에 의해 한의는 모두 쫓겨났다. 1914년 1월에는 한의를 의사가 아닌 ‘의생’으로 격하시키며 보건의료제도에서 공식적으로 소외시켜 버렸다. 마침내 36년의 일제강점기에 한의사제도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광복이후 일제강점기 동안의 식민문화를 극복하려는 많은 이들의 피땀 어린 노력에 의해 1951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되어 한의사 제도가 겨우 회복됐고, 아직까지 제도적 불평등이 의료제도 곳곳에 존재하지만, 지금의 현대한의학으로 발전하며 국민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9월10일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한의학이 치욕스러운 일제 강점기의 유산’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의 기자회견을 했다. 적반하장의 전형이다. 일제강점기에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양의사들이, 일제강점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큰 한의학에 대해 일제강점기의 유산이라니, 6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에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던 한의사 강우규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하여 ‘고문왕’으로 불린 일제 고등계형사 김태석이 광복 후 반민특위에서 친일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다. 이를 보면 의사협회는 민족정기를 말살코자 했던 친일파를 그대로 흉내내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윤성찬 경기도한의사회장

[변평섭 칼럼] 700년 百濟가 5일 만에 무너진 것은…

서기 660년 7월, 그해 여름도 무척 더웠다. 그러나 백제의 왕도 사비성(지금의 충남 부여)은 의자왕의 독선과 아집, 권력층의 분열로 내홍을 앓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평화로웠다. 부소산 낙화암 아래 백마강에서는 여기저기 흥겨운 뱃놀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사비성의 평화를 깨뜨리는 급보가 전해졌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10만 대군이 사비성의 관문 기벌포(지금의 금강 하구·충남 서천군 장항읍)에 물밀듯 상륙을 시작했으며, 백제의 동쪽 탄현(지금의 大田 계족산성 일대)에는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급보였다. 그 순간 백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의자왕을 비롯, 모두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고 백성들은 도성을 빠져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때에, 전혀 생각도 못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백제는 신라가 감히 침공해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당나라가 신라와 손잡고 황해를 건너오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 신라보다 국력이 월등했던 백제였고 특히 의자왕은 즉위 후 신라의 100여 성(城)을 빼앗았는데, 이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64개 성보다 월등히 많은 전과였다. 그러니 백제는 국가안보에 느긋해졌고 안일한 생각을 갖지 않았을까? 거기에다 당나라는 전통적으로 백제와 깊은 외교ㆍ문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를 배신하여 신라와 연합군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백제의 방심을 완벽하게 이용한 것이 신라와 당나라였다. 신라는 늘 괴롭힘을 당하는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신라의 생존을 도모하고 당나라는 한반도의 분쟁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 영역을 확보하려는 계산에서 신라와 손을 잡은 것.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듯 국제관계는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배반도 하고 손도 잡고…. 영원한 동맹도, 적도 없다는 것 아닌가. 특히 자만에 빠진 의자왕은 처음에 가졌던 리더십을 잃고 점점 향락으로 세월을 보내는가 하면 충성스러운 대신을 귀양 보내는 등 극심한 일탈행위를 이어갔다. 이에 대해 최근 ‘삼국통일 어떻게 이루어졌나’라는 연구서를 발행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는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을 오만과 교만, 갈등과 분열 등, 사회적 통합의 실패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근본적인 백제의 멸망 원인은 ‘정신력’임을 거듭 강조한다. 생각해 보면 660년 7월10일,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부여)을 함락하고 웅진성(지금의 충남 공주)로 도망간 의자왕이 항복하기까지 불과 5일 밖에 걸리지 않았음이 이 교수가 지적한 백제 최후의 ‘정신력’이 얼마나 한심했던가를 짐작게 한다. 특히 당나라에 붙잡혀 간 의자왕이 묻혀있는 중국 낙양 북망산에 가면 13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시절의 회한이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온다. 그렇게 백제의 최후는 허망했다. 그리고 그것은 의자왕 스스로가 몰고 온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번 주 금요일(9월14일)부터 충남 공주와 부여 일원에서 ‘한류 원조, 백제를 즐기다’라는 주제로 제64회 백제문화제가 풍성하게 열린다. 노래와 춤, 그리고 계백장군을 비롯해 성충, 흥수 등 세 충신에 대한 제향도 올리며 백마강에 몸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원혼도 위로하는 행사도 갖는다.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낙화암에서 눈을 감고 백제 최후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