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역사의 門 해방 70년 京畿] 24.신간회, 좌우익 합작운동의 숨은 주역 박동완 선생

31운동은 항일투쟁의 방향을 왕조로의 복귀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건설로 전환시킨 위대한 혁명이었다. 독립을 향한 한국인들의 열망은 뜨거웠다. 그러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투쟁의 방법, 주도권을 놓고 끊임없이 다투었다. 출신지역과 좌우의 이념대립은 독립운동 진영의 기운을 갉아먹었다. 1922년 임시정부의 대립과 분열을 통탄하던 신규식은 돌연 단식을 시작해 25일이 되던 날에 운명했다. 죽음으로 단합을 촉구했음에도 단결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현실에서 1927년에 출범한 신간회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신간회는 지역과 이념과 투쟁방법을 두고 분열됐던 운동진영을 하나로 묶어세웠다. 신간회 본부의 상임 간사로 활약했던 박동완(朴東完, 1885~1941)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다. ■ 무궁화 삼천리 강산을 사랑한 청년 1885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혹은 포천군 신읍리)에서 박순형의 차남으로 태어난 박동완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해 온 가족의 사랑을 받았다. 부친 박순형은 배일사상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박동완은 13세에 현석운의 딸 현미리암과 결혼했다. 아내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장인은 개화한 기독교인이었다. 박동완은 십대에 서울로 이주해 신학문에 뜻을 두고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했다. 다시 배재학당 대학부로 학적을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배재학당에 재학하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박동완은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했다. 정동제일교회는 1885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로 상동교회와 함께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박동완의 호는 무궁화골이란 뜻의 근곡(槿谷)이다. 근곡은 일본의 표준시간에 맞춰 살지 않겠다며 시계바늘을 30분 늦추었을 정도로 일제의 식민정책에 일체 타협하지 않은 민족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 민족을 위해 십자가를 지다 박동완은 31세가 되던 1915년에 창간된 주간신문 기독교신보의 서기와 주필로 활동했다. 이때부터 그는 글쓰기와 강연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는 교육 사업에 전념했다. 1919년 초 윌슨 미국 대통령이 파리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크게 고무됐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이는 독일을 비롯한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에만 적용된 사안이었다. 박동완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했다. 2월 중순 무렵, 그의 직장으로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가 찾아왔다. 대화는 민족자결주의로 모아졌다. 조선도 민족자결에 의해 독립하는 것이 좋겠다는 그의 말에 박희도가 찬성했다. 27일 낮에 박희도가 다시 찾아왔을 때 박동완은 누구든지 독립을 원한다면 찬성하니 자신도 참여하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날 저녁 박동완은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의 사무실에서 기독교계 대표들과 함께 독립청원서에 서명 날인했다. 28일 저녁에는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 집을 방문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독교, 천도교, 불교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결의를 다지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3ㆍ1운동은 마른 들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지역과 계층,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3월 하순 수원에서는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던 기생 김향화를 비롯한 33명이 경찰서 코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과 자유를 열망하는 한국인들의 가슴은 뜨거웠다. 불과 두어 달 만에 200만명이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민중들의 비폭력 투쟁을 일본 경찰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했다. 박동완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심문을 받았다. 문 : 피고는 조선독립이 꼭 될 줄로 생각하는가? 답 : 그렇다. 일본과 여러 나라가 허락할 줄로 생각하고 있다. 문 :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 물론 그렇다. 처음 3년형을 구형받았던 박동완은 2년형으로 확정돼 경성감옥으로 이송됐다. 유치장에서 보낸 날을 합해 2년8개월을 갇혀 지냈다. 수감 중에 천도교의 대표로 참여한 양한묵의 별세 소식과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던져 내란죄로 투옥 중이던 강우규 의사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동완의 죄명도 내란죄였다. 일제의 고문과 협박이 이어졌지만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 글과 강연으로 청년을 깨우다 3ㆍ1운동 이후 박동완은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 됐다. 일제의 감시의 눈길만이 아니라 동포들도 그의 행보를 주시했다. 그것은 민족대표로서의 숙명이었다. 박동완은 출소한 뒤부터 기독교언론활동에 힘을 쏟았다. 무단으로 조선을 통치하던 일제는 3ㆍ1운동 이후 문화통치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때 개벽, 신생활, 신여성 등 다양한 교양잡지들이 출간됐다. 박동완은 1923년 7월에 창간된 신생명의 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편집인과 발행인을 외국인 선교사로 정했다. 하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1925년 10월 4일자 동아일보에 선생은 그간 기독교신보 주필로 계시다가 작년(1924) 7월부터 창문사에서 발행하는 신생명을 주간하시는데 모든 것이 뜻과 같이 아니되어 붓을 버리고 약 1개월 전부터 동서문안 경성공업사에서 일을 보신답니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직접 회사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던 박동완이지만 기독교인들이 배금주의에 물드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다. 그는 물질생활에 어리석은 노예가 되지 말고 참 생명을 위하여 초월적 신생활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동완은 민족의 장래가 걸린 청년교육에 특히 정성을 쏟았다. 1922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의로운 청년이란 제목으로 강연한 것을 비롯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청년들을 향해 열변을 토했다. ■ 신간회의 상임 간사로 활약하다 1927년 2월15일 오후 7시에 서울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300여명의 회원과 1천여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간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이상재, 안재홍과 함께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박동완은 본부 상임간사를 맡아 회의 실무를 관장했다. 신간회 건설은 민족운동 진영의 쾌거였다. 조선일보에 안재홍이 쓴 단일민족진영이란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운동의 출현과 그의 후원 혹은 협동을 주장하는 것은 또 현하 조선의 시대인식이 되어 있다. 단일민족진영이란 것은 즉 파생적 분열을 허치 않는 통일적인 민족주의의 진영을 요구하는 현하 민중의 요약된, 또 대표적인 의사라며 신간회 창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립운동의 주체도 다양했고 투쟁의 방법도 제각각이었다. 건설해야할 나라의 목표도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다. 일제의 분열책동도 집요했지만 갈등하고 대립하는 풍토를 속히 바꾸지 않으면 해방의 날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때에 신간회가 조직되었던 것이다. 좌우익 세력이 합작해 조직한 신간회를 통해 민족운동의 방향을 찾은 박동완은 한국인의 따뜻한 심성에 기대를 걸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928년 별건곤이란 잡지에 쓴 내가 자랑하고 싶은 조선의 것-특히 애정이 풍부란 글에 녹아있다. 이 글에서 그는 조선 사람들은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보다 진실한 사랑심[愛心]과 순연한 인류애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 죽어서 귀국하다 1928년 8월 박동완은 동지들의 전송을 받으며 미국으로 떠났다.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초청을 수락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한인교회 목회자로 활동하며 교민들의 생활향상에 힘을 쏟았다.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통해 교포2세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 조국의 여학생들이 만든 수예품을 미국에 판매하기 위한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1931년에는 하와이 학생모국방문단을 이끌고 귀국해 석 달 동안 머무르며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하와이 동포들의 근황과 신앙생활을 알리는 강연회를 열었다. 하와이에서도 문필을 통한 계몽운동은 계속됐다. 박동완은 1934년에 한인기독교보를 창간해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기독교인으로 그가 바랐던 것은 순전한 조선교회, 즉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운영되는 교회가 아니라 한국인의 장점을 드러내는 주체적 교회였다. 1941년 봄, 불의의 병을 얻은 박동완은 이국땅에서 운명했다. 향년 57세. 사후 한 달이 지나 그의 유해는 가족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던 아내와 자녀들을 죽어서야 만났다. 31운동의 동지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는 1966년에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오산발전포럼, 분단의 현장 DMZ 가다

오산발전포럼(의장 이권재)은 6일 초중고대학생 및 회원과 일반인 등 6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제2회 DMZ 탐방행사를 개최했다. 올해 두 번째를 맞는 DMZ 탐방은 남북 분단의 문제의식과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대 시민 인식의 확산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철원군 김화읍 인근 DMZ 내 분단의 현장을 시민과 학생들이 직접 찾아 체험하도록 했다. 이날 행사는 민간인 공개를 앞둔 DMZ 남방한계선 인근 십자탑 탐방로 등의 체험과 통일기원문 낭독, 국군장병 편지쓰기, 독도플래시, 군 장병 위문품 전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통일기원문을 발표한 오산고 부소영, 윤중섭 학생은 그동안 우리가 처한 분단문제에 대해 애써 외면해 온 것이 사실이라며 분단의 아픔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 나와 내 가족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됐다고 전했다. 이날 십자탑 탐방로 체험이 끝난 뒤 별도로 마련된 통일기원 행사에서는 모든 참가자와 주변의 일반시민들이 독도플래시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노래와 율동으로 감동의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이권재 의장은 분단 70년이 지난 지금 통일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시급하다며 DMZ 탐방을 통해 학생에서 일반인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통일의 절심함이 공유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산발전포럼은 이날 행사준비를 도운 육군 부대에 축구공 등 위문품을 전하며 감사를 표한 데 이어 행사에 참여한 중학생들은 군 장병에게 감사의 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오산=강경구기자

남양주 힐링센터 ‘운길산 숲 힐링피아’ 본격 운영

남양주시는 조안면에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는 전문 힐링센터 운길산 숲 힐링피아가 문을 열고 본격 운영을 시작했다고 6일 밝혔다. 남양주 주필거미박물관(관장 김주필)내 마련된 운길산 숲 힐링피아는 박물관 측이 장소와 시설을 제공하고, 힐링문화기업 (주)창조와소통, 늘해랑 인성교육협동조합이 함께 운영을 맡는다. 계곡의 물과 숲으로 둘러싸인 청정 거미박물관에 편백나무로 만든 4개의 힐링룸을 만들어 건강과 자연치유, 스트레스 해소와 마음 안정, 소통과 공감 등 다양한 힐링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일반적으로 힐링이라 하면 정적인 명상이나 자연 속 산책, 음악감상 정도이지만, 힐링피아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기본적 호흡, 명상의 전문성에 음악, 댄스, 미술, 스포츠 등을 융합한 콘텐츠로써 다양하고 재미있는 요소를 구성하고 있다. 김주필 거미박물관장은 남양주 청정지역에서 평생을 바쳐 가꿔 온 거미박물관에 힐링피아가 들어서 매우 기쁘다라며 앞으로 많은 분들이 힐링피아를 통해 몸과 마음을 치유하시길 마란다고 말했다. 박경태 (주)창조와소통 대표는 운길산 힐링피아가 지향하는 힐링은 밸런스 라이프를 위한 밸런스 힐링이라며 뇌 과학을 기반으로 한 멘탈 프로그램으로 몸의 균형과 마음의 조화를 이뤄 찾는이들의 진정한 힐링을 추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남양주=유창재ㆍ하지은기자